지난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해서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조각가 김운성, 김서경 부부가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한복을 입고 단발머리에 무언가 슬픈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조선의 소녀.
그 소녀상은 위안부로 끌려갔던 수많은 조선 처녀들의 고통을 상징하듯, 신발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어깨에 살포시 앉아 있는 새는 세상을 떠난 피해 할머니들과 현실을 이어 주는 매개체이다. 이제 ‘평화의 소녀상’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미국, 독일, 호주,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국제적으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할머니들이 모두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일본은 하루빨리 진심어린 사과를 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 개정판 저자의 말 중에서
나는 그 순간 상하이에서 일본 군인들의 군홧발에 차이고 주먹으로 얻어맞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그 일본 여자가 나처럼 여겨졌다.
“아,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이 일본 여자는 내가 잘 아는 여자예요. 내가 어려울 때 도와 준 착한 사람이라고요. 그러니 제발 좀 살려 주세요!”
나는 일본 여자를 감싸 안았다.
(중략)
“자, 입어요! 그렇게 기모노를 입고는 일본으로 가지 못해요. 이걸 입고 부산으로 가세요. 가서 어떻게든 일본으로 가는 배를 찾아보세요. 자, 어서!”
(중략)
“고, 고마스무니다. 고마스무니다!”
여자는 두 손을 무릎에 모은 채 몇 번이나 절을 했다.
나는 문득, 남경에 있던 나와 친구들을 구해 준 일본 장교가 떠올랐다. 그가 나를 위해 여행 증명서를 끊어 주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에 비하면 지금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부디 이 일본 여자가 나처럼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 p.118~119
얼마 후 식구가 늘어나자 우린 혜화동으로 이사를 갔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 방 두 칸뿐인 낡은 한옥집이었지만 우린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우린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살아갔다.
“당시 소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자수 시간에 일본 지도에 벚꽃 대신 나팔꽃을 수놓았다고 주재소에 끌려가 일본 순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후쿠오카로 강제로 보내졌지. 거기서 하루 스무 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하며 지낸 6년간의 위안부 생활로 얻은 것은 몹쓸 병뿐이었어. 그 후 내 인생은 시궁창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지.”
“나는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돌아오는데 갑자기 힘센 사내들이 나타나서는 나를 냉큼 붙잡아서는 트럭에 태웠어. 아무리 발버둥 치며 울어도 소용없었어. 난 강제로 끌려간 거야, 내 나이 열다섯에 말이야. 어머니, 아버지한테 말 한마디 못 하고……. 만주에서 돌아와 보니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다 돌아가시고 난 고향에도 못 있고 그 길로 혼자 근근이 살았어.”
우리들은 눈물을 흘리며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 p.133
“정말 분해. 나는 내 책상 서랍에서 일제 크레파스, 일제 연필, 지우개, 샤프, 장난감들을 꺼내 몽땅 다 쓰레기통에 버렸어.”
“일본 사람도 미워!”
“그래, 과거에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냥 간단히 ‘할머니, 정말 미안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잖아. 우리들도 친구랑 다투거나 잘못했을 때는 ‘미안해’라고 말하는데…….”
“맞아, 맞아!”
아이들은 모두 울분에 차서 외쳤다.
- p.174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