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오늘 새벽에는 초승달을 보며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고 빌었어요. 변소에 가려고 마당에 나왔다가요. 초승달에 낀 흰 달무리가 몽글몽글 떠오르는 순두부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벙긋 벌렸어요. 그것을 먹으려고요.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 p.7
나는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두 손을 배로 끌어당긴다. 생리가 없는데도 내 몸에 아기가 들어섰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606호 주사를 맞아 한두 달씩 생리가 끊기고는 했으니까. 달포에 한 번 군의관은 내 아래를 살핀다. 두 동강 난 탑의 반쪽처럼 생긴 나무 의자에 올라가 가랑이를 찢듯 벌리게 하고서. 대머리에 송곳처럼 찌르는 눈빛을 가진 군의관은 내 아래가 조금만 이상해도 팔뚝에 606호 주사를 놓는다. 피를 맑게 해준다는 그 주사는 오줌빛이 도는 주사약으로 팔뚝 안쪽에 놓는데 맞을 때 도끼로 찍는 것 같다. 처음 그 주사를 맞고 나는 너무 아파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은 주사이기도 하다. --- p.16
낙원위안소에 온 첫날 악순 언니는 내게 물었다.
“너는 무슨 죄를 지어서 조센삐가 되었지?”
조선말로 물었지만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는 자신에게 묻고 묻는다. 너는 무슨 죄를 지어서 조센삐가 되었지?
정말, 나는 무슨 죄를 지어서 조센삐가 되었을까. --- p.26
살아서 돌아오라고 빌어달라는 군인들이 있다. 그들의 어머니나 아내, 애인, 누이들은 너무 멀리 있으니까. 전투를 앞두고 겁에 질린 군인을 보면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빌어준다. 죽지 말고 살아 돌아오라고. 내가 빌어줄 때 그들의 어머니나 아내, 애인, 누이들은 뭘 하고 있을까. 쌀을 씻고 있을까, 바느질을 하고 있을까. 나는 살아 돌아오라고 빌어주면서도, 살아서 돌아올까봐 겁이 난다. 살아서 돌아와 다시 나를 찾아올까봐.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들이 다시 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뻔했으니까. 살아 돌아온 군인들 대개는 반쯤 미치광이가 되어서 나를 짓뭉개고, 깨물고, 찔렀다. --- p.29
우리는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려 애쓴다.
우리에게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인 오지상조차도.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줄 모르는 해금은 자신이 어수룩해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한다. 악순 언니는 부모 없는 고아 신세라서, 점순 언니는 자신의 팔자가 사나워서, 끝순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요시에는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을숙 언니는 직업소개꾼에게 속아서. 애순 언니는 그냥 이곳이 어딘지 잊어버린다.
죄를 지어서 그 벌로, 혹은 사나운 팔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곳이 어딘지 잊어버리는 게 나을까.
나는 이곳이 어딘지 잊어버리려고 애쓴다. 그런데 나는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 p.52
“내 이름은 금자…… 네 이름은?
여자애는 내게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열다섯 살…… 너는?”
여자애는 나이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비단 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왔는데 너는 어디 가는 줄 알고 왔니?”
여자애의 입이 살포시 다물리더니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 p.92
나는 편지를 쓰다 말고 강물로 얼굴을 가져간다. 두 눈을 감고 얼굴을 강물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내 얼굴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고 싶다.
두 귀가 강물에 잠기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순간 나는 눈을 뜬다.
내 몸 안에 떠도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메아리처럼 떠도는 소리들이. ‘엄마, 엄마…… 엄마, 아무 데도 가지 마…… 살려줘……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집에…….’ --- p.134
나는 군인이 내 몸 위에서 죽을까봐 겁이 난다.
“너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해…… 전쟁이 아니었으면 너도, 나도 고향을 떠나…… 이 먼 데까지 오지 않았겠지…… 너는 일본 군인…… 나는 조선 여자……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나는 당신을 위로하지…….”
늙은 여자처럼 한탄하던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 p.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