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도량 겁외춘추’라는 말은 무처처無處處 무시시無時時입니다. 즉 처소 없는 처소, 시간 없는 시간이 우리의 청정 본성입니다. 그 청정본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불생불멸은 무두무미無頭無尾,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습니다. 머리 꼬리가 없고, 생멸이 없는 그 본원자성이 바로 청정도량이요 겁외춘추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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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宗梵이 참회송懺悔頌과 참회문답을 하나 지었습니다. 우리나라 근 · 현대 큰스님들을 보면 도를 깨달은 오도가悟道歌를 남기셨습니다. 경허鏡虛 1846~1912 큰스님께서 지으신 깨달은 노래, 오도가가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 전에 그것 하나 보고 죽는 것도 대단한 복입니다. 또 경봉 큰스님께서는 오도송, 주인공 문답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종범은 참회송懺悔頌과 참회문답懺悔問答이라는 것을 지었습니다. 먼저 참회송을 들어 보시겠습니다.
三十年來枉用功 삼십년래왕용공
許多言動盡慙愧 허다언동진참괴
卽色空句身一轉 즉색공구신일전
物物元是古道場 물물원시고도량
삼십여 년 동안 공을 그릇되이 썼더라.
여러 가지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돌아보니 부끄럽다.
색이 공하다는 구절에서 몸이 한번 뚝 떨어지니
모든 것이 다 원래 옛 도량이더라.
이것이 참회송입니다. 어느 날 가만히 누워 있는데 갑자기 색이 공했다는 말이 머리에 스치더니 몸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색이 공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구절에서 몸이 한번 뚝 떨어지니, 마음도 형상도 티끌도 그 모든 것이 다 옛 도량이었습니다.
--- pp. 21~22
참다운 휴식으로 돌아가고 참다운 자유로움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기도하거나 경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육정을 통해서 밖으로 밖으로만 가기 때문에 결국 거기에서 근심이 생기는데, 기도하거나 경을 읽을 때는 그것을 안으로 불러들이니까 그 녀석들이 제멋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하면 자기 자성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첫째는 저 밖으로 헤매는 마음을 불러들이고, 둘째는 자기 자성으로 돌아가게 하니까, 그것이 참으로 대단한 이익이고 대단한 공덕입니다. 그것을 잘 믿어야 합니다. 발심은 선후가 있지만 그 마음을 깨닫는 데는 선후가 없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꾸 닦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 pp. 25~26
수행은 깔때기가 아닙니다. 수행은 마중물입니다. 옛날에 수도시설이 없을 때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서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다가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물을 다른 데서 한 바가지 떠서 펌프에 붓고 펌프를 누르면 물이 올라옵니다. 한 번 물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계속 올라옵니다. 이 한 바가지 붓는 물을, 물을 마중한다고 해서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수행도 이와 같습니다. 밖으로 밖으로만 향하던 그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반조返照를 하면 문이 열립니다. 문이 한 번 열리면 거기에 『화엄경』에서 말하는 2,000가지 이익이 그냥 올라옵니다. 사시사철,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그냥 올라옵니다.
이처럼 중생심은 깔때기, 수행은 마중물에 비유합니다. 그 마중물 한 바가지만 부으면 됩니다. 그러면 수행은 무엇이냐? 일상수행, 즉 항상 복과 지혜를 닦는 것입니다. 복은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쁘고 다 기쁜 것입니다. 지혜는 내가 나를 찾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결국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나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나는 없습니다.
--- pp. 52~53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의 알맹이, 인간의 진실상을 깨달아서 모든 껍데기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공포의 껍데기, 불안의 껍데기, 괴로움의 껍데기, 전부가 가짜고 허명虛名입니다. 평생 가짜의 모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요즘은 더 심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늙고 죽을 몸인데, 얼굴 고치고 몸매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얼짱 껍데기, 몸짱 껍데기는 얼마 못 갑니다. 그보다는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한 나의 진실상을 찾는 원융무이 부동본적, 이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 pp. 78~79
깨달음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망상집착에서 한 마음이 번개처럼 일어나면 바로 깨달음입니다. 털끝 하나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지 따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작이 아니고 크게 깨닫는 대오大悟입니다. “아하!” 하는 작은 깨달음은 백년 깨달아도 소용없습니다. “악!”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악!” 하면 일체 명상名相이 다 끊어집니다. 죽는다 · 산다, 있다 · 없다, 이런 것은 전부 자기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 pp. 9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