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창세 17, 5)
“너의 아내 사라이를 더 이상 사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창세 17, 15)
참으로 송구한 일이다. ‘아브라함’에서 ‘아브’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함’은 백성 혹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나를 민족의 아버지, 백성의 아버지로 세우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내의 새 이름 ‘사라’도 ‘여왕’이라는 뜻이니, 영광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하느님에 의해 민족들의 아버지와 여왕이 되었다.
하느님은 더 나아가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창세 17, 7)고 약속하셨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이 있을까. 하느님은 또한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창세17, 8)라고 하셨다. ---p.30 중에서
할례는 당시 가나안 토착민족을 비롯한 인근 다른 민족들에겐 없는 풍속이었다. 일부 이집트인들이 위생 문제 때문에 할례를 하기는 했지만, 유대인들처럼 할례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할례의 방법에서도 유대인들은 돌로 만든 칼로 시행하는 전통, 곧 아브라함까지 소급되는 전통을 고수했다.(탈출 4, 25 ; 여호 5, 2-3)
하지만 할례는 처음에는 그리 중요한 규정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명기』에서 할례를 두 번 언급하는데, 두 번 다 ‘마음의 할례’를 말한다.(신명 10, 16 ; 30, 6) 예레미야 예언자도 ‘마음의 할례’를 역설한다.(예레 4, 4) 하지만 뒤에 유배 시대에 가서는 할례가 안식일 준수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두 행위가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결속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할례는 유대인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할례는 사실 다른 민족들이 볼 때 튀는 행동이었다.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통치자들은 할례를 박해의 꼬투리로 삼았다. 이방계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할례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나타냈다.
할례와 함께 유대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게 하는 뚜렷한 또 하나의 표지가 ‘안식일 규정’이었다. 안식일 규정의 배경을 놓고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 p.80 중에서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는 과정을 보면, 조선왕조 초기에 왕자들이 벌인 왕위 다툼과 판박이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왕 뒤에는 항상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왕자들이 있다.
솔로몬은 그 ‘왕자의 난’ 속에서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왕위에까지 올랐다.
다윗 왕국판 ‘왕자의 난’의 씨앗은 다윗 왕의 맏아들 암논 왕자에 의해 뿌려졌다.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윗의 맏아들 암논 왕자가 이복 누이동생 타마르 공주를 성폭행하는 패륜을 저질렀다.(2사무 13, 1-14) 그런데 타마르 공주에게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동생, 압살롬 왕자가 있었다. 이 압살롬 왕자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분노한 압살롬 왕자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형 암논을 죽인다.(2사무 13 ,23-30) 이유야 어찌되었건 동생이 형을 죽인 것이다. 당연히 압살롬 왕자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처음에는 반란이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성공 직전에 실패하고, 압살롬 왕자는 살해된다.(2사무 15, 1-18, 17)
이후 벌이지는 일은 점입가경이다. 한 번 흐트러진 질서는 회복하기 힘들다. 넷째 아도니아 왕자도 왕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와 그 측근들의 발 빠른 움직임 덕분에 실패했고, 결국 솔로몬이 다윗왕의 후계자로 지목된다.(1열왕 1, 5-53 참조) -- p.145∼147 중에서
군사 전술용어 중에 '강습'이라는 말이 있다. 적에게 예고 없이 공격하는 불의의 기습을 일컫는 말이다.
마카베오군과 엠마오에서 대치한 진압군이 바로 이 강습작전을 사용했다.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진지를 지키고 다른 한 부대는 야간에 마카베오 진영을 급습하는 작전을 쓴 것이다. 하지만 실수였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보병 5천 명, 기병 천 명)을 보유한 진압군은 병력을 둘로 나눌 필요가 없었다. 정면대결을 펼칠 경우, 병력과 장비 면에서 절대 열세인 마카베오군(보병 3천 명)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마케베오군은 오늘날의 탱크에 해당하는 기병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진압군은 소규모 정예 부대를 별도로 편성, 강습작전을 폈고, 그 결과는 패배로 이어졌다.
야간에 마카베오 진영을 급습한 진압군 특공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마카베오 진영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강습작전을 미리 간파한 마카베오군은 이미 진압군 진영으로 밀고 들어간 상태였다.
마카베오군은 주력 정예 병력이 빠진 진압군을 쉽게 섬멸할 수 있었다. 마카베오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창을 진압군 특공대에게로 돌렸다. 이미 승세는 기울어져 있었다.“사태를 파악한 적들은 몹시 겁을 내었다. 게다가 유다(마카베오)의 군대가 들판에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오늘날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으로 달아났다.”(1마카 4, 21-22) --p.219∼221중에서
“유대인은 모두 게토에 있는 집단 거주지에서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 문은 아침에 열리며 자정에 보초병이 닫아야 한다. 자정 이후에 유대인은 밖을 다닐 수 없다. 보초병에 대한 급료는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격리된 곳은 한때 주물공장이 있던 곳으로, 섬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게토라는 말이 주물을 뜻하는 라틴어 게타레(Gettare)의베네치아 말 ‘기센’, ‘기세라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토에 장벽이 세워졌다. 밖으로 연결된 두 개의 통로에는 각각 두 명씩 모두 네 명의 보초가 배치됐다. 섬 주위에는 여섯 명이 감시용 선박을 타고 수시로 순찰했다. 이들 열 명의 급료는 모두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했다. 게토에 수용된 인원은 2412명이었다. 백 년 후에는 게토 공간을 넓혀 총 5천여 명의 유대인들을 수용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좋은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토에 머무르는 동안은 타민족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했다. 율법 준수 및 회당에서의 모임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스스로의 취지에서 만들어진 게토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게토는 또 이슬람교도들의 인신매매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은 유대인 납치에 적극 나섰는데, 이는 납치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유대인 사회가 많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 p.32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