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인문학이 필요한 디자인
디자인에 부는 인문학 바람 디자인 경쟁 시대 변화 속의 디자인 _기능주의라는 위장술 | 소비자가 아닌 인간을 봐야 할 때 | 소통이 필요하다 변화의 징후들 _대중을 만나자 | 인문학이라는 카드 디자인은 이미 인문학이었다 _시각적 조화 | 개성의 표현, 아이디어 | 세계에 대한 이해 | 영혼을 흔드는 감동 2부. 디자인을 만드는 것들 기술과 디자인 _기술이 최고 같던 시절 | 첨단 기술이 디자인을 만든다? | 기술의 한계 | 기술 발달에 대한 착각 | 기술 없이도 디자인은 존재한다 | 기술을 넘어 상업성과 디자인 _디자인은 상품이다? | 상업성을 넘어 예술성과 디자인 _감성이 아니라 예술 | 예술은 디자인의 자산 3부. 디자인을 구성하는 것들 좋은 디자인을 찾아서 형식과 내용 외적 요소인 형식 _형태 | 색상 내적 요소와 그 위계 _문화인류학적 가치 | 철학적 가치와 감동 4부.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 세상과 디자인 _세상을 만든 디자인 | 세상이 만든 디자인 | 사회를 비판하는 디자인 | 사회를 치유하는 디자인 역사와 디자인 _역사를 만든 디자인 | 역사가 만든 디자인 5부. 인문학의 꽃, 디자인 인문학과 디자인 _인문학은 도구가 아니다 | 인문학은 융합의 대상이 아니다 | 인문학의 체계 예술과 디자인 _디자인이 보는 예술 | 디자인과 예술의 흐름 | 아트와 예술 디자인은 예술이 되어야 한다 _예술은 관계를 만든다 | 예술은 감동을 준다 철학과 디자인 _두 가지 측면 | 철학이 만든 디자인 | 철학적 디자인 우주관과 디자인 _물리학적 우주관과 현대 디자인 | 불규칙성의 등장 | 유기적 우주관의 등장 | 이제, 자연으로 맺음말_ 인문학적 디자인을 기대하며 |
저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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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와인 오프너 패롯(Parrot, 앵무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유머러스한 감수성을 표현해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얻고 있다. 이런 디자인은 마케팅 기법이나 시장조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취향을 통한 접근 역시 대중을 세분화된 소비자로 나눌 뿐이다. 훌륭한 디자인은 보편적인 사람과 만난다. 즉 디자인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을 매료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성에 기대면서 사회적 의미를 함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 매만지게 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카드이다.
--- p.33, 그러나 특별한 기술이나 첨단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경우에도 훌륭한 디자인은 얼마든지 많다. 일본의 산업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의 벽걸이형 CD 플레이어에서는 독특한 형태나 첨단 소재 또는 첨단 기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몸체는 어느 전자 제품에든 사용하는 플라스틱이고, 뛰어난 음질을 자랑하는 스피커가 장착된 것도 아니다. 기능적으로 볼 때 CD가 뚜껑 없이 돌아가는 방식은 실용성이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선 환풍기의 형태를 응용한 이 CD 플레이어에서 추억을 환기하고, CD 플레이어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는 데에서 어떤 총체적이고 심미적인 감흥을 받는다. 수용미학(受容美學)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디자인에 바라는 ‘기대의 지평선(Erwartung Horizont)’과 실제 디자인과의 격차에서 발생한 심미적 거리에서 오는 감흥이다. 이런 감흥은 그 어떤 첨단 기능과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디자인들이 주는 것보다 강렬하다. 기술이나 기능의 차원에서는 다룰 수가 없는 가치이다. --- p.65, 관계성에서 보면 상품이라는 것도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사고파는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규정되는 상대적 존재태(存在態)일 뿐이다. 말하자면 무언가를 매매하는 좁은 공간 안에 있을 때만 그것은 상품으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이슨의 청소기가 상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매장에서 거래가 종료될 때까지만이다. 게다가 상품이라는 것도 사실은 판매자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구매자는 상품을 산다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돈을 지불하고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매자의 입장은 이런 점에서 매우 문화인류학적이다. 또 물건을 구입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상품이 아니라 구매자의 삶을 조직화하는 문화인류학적 대상으로 바뀐다. 사실상 디자인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 p.77 주방에서 사용하는 조그마한 저울이 독특하면 얼마나 독특할까 싶지만, 에바 솔로에서 선보인 제품을 보면 인간이 생활하는 아주 좁은 틈바구니에서도 문화를 녹여내는 디자인이 가진 힘이 실로 위대하게 느껴진다. 투명한 유리 실린더가 저울이 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안에 있는 스프링이 무게를 가늠하는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새롭다. (중략) 최첨단 기술과 소재로 얼마든지 더 기능적인 디자인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기술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 저울은 시간을 거꾸로 향한다. 유리나 금속 스프링 정도의 재료에서는 첨단의 흔적을 조금도 엿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고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첨단 디자인보다 혁신적이다. 아마도 저울을 사용하는 행위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덤덤한 재료나 기술과 대비되면서 더욱 참신하게 다가오지 않나 싶다. 이런 디자인을 기능성이라는 건조한 프레임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일 것이다. 요즘같이 디지털의 편리함으로 삶이 꾸려지는 때에 이 같은 아날로그적 방식은 매우 따사롭게 느껴진다. 저울 하나로 주방의 정서적 온도가 상승한다. 따라서 이러한 디자인은 단지 생산 활동이 아니라 문화인류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p.108 샤넬이 옷의 중심에 ‘계급’이나 ‘장식’이 아니라 ‘편리함’과 ‘기능’, 그리고 ‘평등’을 둘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활동했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샤넬이 활동을 시작한 1910년대에는 입체파나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움직임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최초의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가 이때 설립되었고, 영화라는 매체가 등장하여 새로운 시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그처럼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는 ‘기능성’과 ‘단순함’이라는 방향으로 향했다. 샤넬은 바로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현대인이 입을 옷의 밑그림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패션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현대를 디자인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녀가 만든 옷은 그저 옷이 아니라 20세기 인문학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은 그녀를 ‘20세기의 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p.129 20세기 후반까지 입자론에 입각했던 물리학은 이렇게 생물학에 기초한 관점의 도전을 크게 받는다. 해체주의는 그런 인식의 전환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문화 현상이었다. 그저 건축물의 형태를 깨부수는 수준이 아니라, 물리학적 우주관과 생물학적 우주관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해체’라는 표현은 해체주의 건축가라 불리던 이들의 입에서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 디자인 경향도 해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형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우주를 기계가 아닌 생명체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불규칙해 보이는 것을 지향하고 구불구불하거나 유선인 형태가 많이 나타나는 양상은 찰나의 유행이 아니라 기계에서 생명으로 우주관이 전이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우주관의 변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디자인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 p.247 |
디자인에 부는 인문학 바람
디자인과 인문학은 어떤 관계이며, 그 속에서 디자인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디자인 분야에도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다. 사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디자인은 곧 산업으로 취급되었고 생산의 영역으로 제한되면서 기능성의 실현 등에만 충실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실용주의 디자인이 별다른 수정 없이 이 땅에 뿌리내리며 가치보다는 기능을, 대중의 생활보다는 기업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하고자 한 것이다. 전문성이라는 굴레 속에서 서로 다른 분야들과 소통하지 못한 채 단절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기업들의 주도하에 인문학의 필요가 강조되는 추세다. 과거와 달리 더 이상 기술만으로는 디자인이 당면한 문제들을 돌파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다는 것, 따라서 어떤 본질적인 깨달음과 새로움이 절실해졌다는 의미다. 이는 분명 반길 만한 변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문학 붐의 저변을 보면 경영학이나 과학, 또는 기술 분야에서 방법론을 들여와 디자인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기존의 접근 방식과 다르지 않다. 인문학을 일종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인문학은 디자인 외부가 아니라 디자인의 내부에 이미 존재해 왔다. 나아가 디자인 자체가 하나의 인문학덩어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문학 서적을 뒤적일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 과연 무엇인지부터 살피는 일이 핵심일 것이다. 디자인과 인문학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디자인 바깥의 인문학 이론보다는 디자인 내부에서 쌓아 올린 인문학적 성취들을 먼저 파악하는 쪽이 의미가 크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디자인이란 무엇을 통해 만들어지며, 디자인을 구성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를 풍부한 사례를 살펴본다. 기술, 상업성, 예술성 등 디자인을 둘러싼 몇몇 개념을 진단하고(2부 ‘디자인을 만드는 것들’), 우리 눈에 보이는 형식(형태, 색상)을 비롯하여 그 안에 담긴 내용 등 디자인을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는다(3부 ‘디자인을 구성하는 것들’). 이렇듯 디자인 내부를 분석하는 작업에 이어서는 디자인의 외부를 살핀다.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디자인이 주변 환경 및 다른 분야와 교류하는 사례를 찾아본다(4부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 즉 당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이나 주요 가치, 역사 및 전통과 꾸준히 호흡해 온 디자인들을 소개하면서, 디자인을 세상과 유리된 분야라 간주하는 낡은 인식 틀을 흔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디자인이 인문학의 하위 분야인 철학, 예술, 과학(우주관) 등과도 긴밀하게 상호작용해 온 경우들을 알아본다(5부 ‘인문학의 꽃, 디자인’). 2004년 출간 이래 디자인 분야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 Good Design》의 저자는 세계 디자인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디자인부터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최신 디자인 사례까지 두루 다루며 우리 디자인계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한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넘어 진정으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보다 본질적으로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지금 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태도’다 인문학적 통찰력과 비전(vision)이 절실한 때 그런데 왜 ‘인문학’인가? 오늘날 디자인에서 인문학을 강조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은 디자인을 선택하는 데 대중, 즉 사람들의 힘이 부각되어서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디자인 중 자신이 원하는 한 가지를 택하는 것은 이제 기업주가 아니다. 대중, 그러니까 혈관에 따뜻하고 붉은 피가 도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순 수치나 조사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그저 ‘소비자’로 규정하고 경영학 또는 공학의 논리로 다루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느 때보다 절박하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세상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우주관의 변화 또한 디자인계가 인문학을 외치는 배경이다. 기계론적 우주관이 장악했던 20세기를 지나 생물학적 우주관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21세기. 디자인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능성과 실용성 추구에서 벗어나 유기적인 형상, 불규칙한 구조, 자연과의 조화 등을 과감히 시도 중이다. 여기에 인문학적 소양이 든든한 바탕이 되어 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디자인이 멀리서 인문학을 찾을 필요는 없다. 저자에 따르면, 디자인에는 인문학의 모든 분야들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디자인이란 인문학 분야의 다양한 성취들을 총체적으로 담아 표출하는 ‘인문학의 꽃’이자 그 스스로가 인문학이라는 사실. 디자인은 이미 인문학이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 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다. ‘인문학적 태도’이다. 이러한 접근을 토대로 인간과 온전히 소통하는, 진정한 인문학적 디자인을 기대한다. “디자인은 다양한 인문학 분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러한 인문학은 여러 학문들의 병렬적 결합이 아니라 하부와 상부로 구축되는 위계적 체계이다. 즉, 뿌리와 줄기, 잎과 열매로 하나의 연속적 체계를 이루는 나무와 같다. 따라서 디자인에 대한 인문학적 시각도 구조적 · 종합적이어야 한다. 아래로는 우주관, 그 위로 철학, 그 밖의 분야들, 그리고 예술과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인문학적 체계 속에서 디자인의 현상들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때 비로소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인문학이라기보다 ‘인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다. ‘통찰력’이고 ‘비전(vision)’이다.” _‘맺음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