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성들은, 스스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끔 그들을 세뇌하고 있는 얼토당토않은 미의 기준에 얽매인 채, 남자들의 인정을 받을 것을 매일같이 강요당하고 있다.
외모에 관한 선입견 때문에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금액으로 따져볼까. 전 세계적으로 외모 가꾸기에 투자되는 돈은 적어도 136조 8,500억 원이다. 머리 가꾸는 데 대충 45조 2,200억 원, 스킨케어로 28조 5,600억 원, 성형수술 비용으로 23조 8,000억 원이 들어가고, 화장품 및 향수에 소비되는 돈이 각각 21조 4,200억 원과 17조 8,500억 원이다. 그뿐이랴, 미국인들은 다이어트로 47조 6,000억 원을 쏟아 붓고 있으며, 살빼기를 위한 피트니스에다 그보다 더 많은 금액을 소비한다. 그러면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 한다. 다이어트를 했던 사람들 중 95퍼센트는 1~5년 사이에 다시 몸무게가 늘어나며, 화장품 중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혜택이 전혀 없는 것도 너무나 많다.
외모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외모의 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라고 한다. 이건 참으로 역설적이 아닌가! 외모에 대한 투자는 다른 형태의 소비처럼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단 그 새로움이나 참신함이 없어지면, 혹은 하나의 ‘문제’가 해결됐다 싶으면, 새로운 형태의 자기표현이나 개선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니까. 이러한 패턴을 사회학자들은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월터 크롱카이트나 톰 브로코 같은 앵커들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남자 배우들은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연애영화의 주연을 꿰찬다. 숀 코너리는 60대에 피플지가 선정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여자는 어떤가? 젊었을 땐 자기 나이의 두 배인 남자들을 상대로 연기하다가, 노화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우아하게 퇴장하거나 온몸에 “손을 봐야” 한다.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해봤자, 어느 칼럼니스트가 짙은 화장을 하고 나온 여성 정치인을 두고 했던 핀잔이나 듣기 일쑤다: “엔간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아등바등 붙어 있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그녀에게는 어딘지 굴욕적이고, 슬프고, 필사적이며, 보기에 민망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그가 말했던 그 “엔간한 나이”는 기껏 43세였다!
스튜어트 이원의 유명한 표현처럼, 광고주들은 단순히 상업의 캡틴이 아니라 “의식의 캡틴”이다. 사회적인 의미를 창조하고 개인의 욕망과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젊음을 격려해주는 건 좋지만, 젊겠다고 아등바등해서는 안 된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달린 게 아님”을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중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자들이 외모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만 없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마디로 논센스다. 여자들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법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와 특전을 얻게 될 때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한층 더 생기를 잃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아름다움에 얽매어 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여자들에게 힘을 주는 원천의 하나를 깎아 내리는 데 급급하지 말고, 페미니스트들이 여자들의 힘의 모든 원천을 고양시키는 노력을 한다면 좀 더 유용할 것이다.
외모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야지, 수치심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외모에 대한 우리의 이상은 인종, 연령, 몸의 크기에 따른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이렇게만 된다면, 외모의 중요성이 과도하게 평가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취업과 교육이란 장으로 외모의 중요성이 넘쳐흐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성에 따라 차별화된 그루밍을 강요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여성의 자존감은 외모가 아니라 성과에 직결될 것이다.
외모로 인한 차별을 보여주는 하나하나의 예는 사소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축적될 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그러한 편견은 능력의 원칙에 위배되며, 기회 균등을 잠식할 뿐 아니라, 오명을 악화시키고, 자존감을 갉아먹는데다,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계급, 인종, 민족, 성, 성적 취향에 근거를 둔 불이익을 한층 더 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외모를 위한 제품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소비자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상식뿐이다. 사람들은 광고에서 주장하듯이 주름살이 그냥 사라지는 법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것도 받아들이는 인간의 수용력 또한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 ‘코즈메수티컬’ 스킨 케어 제품의 시장이 연 640억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은, 소비자가 ‘알아야 할’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말해준다.
진보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초점을 단순히 그들의 선택에 맞추어선 안 된다. 진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너그러움과, 사회적 태도 변화나 외모에 관한 정책의 변화를 위한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