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 신앙이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고 하셨는데 그런 시각에서 한국교회가 놓친 게 있다면 무엇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박영선] 한국교회에서는 복음이 분명히 인식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복음은 감격적이고 평안을 가져오고 넘치고……” 하는 식으로만 표현이 되니까 내가 어떤 일로 의기소침해지거나 좌절을 겪게 되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쪼그라들게 돼요. 내 기분과 내 확신, 내 의지가 근거처럼 자리해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열매로 고백되었는데 나중에는 열매가 아니라 근거가 된 겁니다. 사실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다, 하나님이 심판자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이 이 땅을 만드셨고 날 만드셨으며, 그분은 선하고 불변하시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기독교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낙관적 근거거든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부분이 부족하죠.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감격이 삶 전체를 형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너무들 쉽게 이야기합니다. “복음이 감격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100퍼센트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살도록 요구하시느냐”에 대해서는 사실 한국교회가 답을 못 내놓고 있습니다. 그냥 감격에서 갑자기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만 남았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가 아주 중요한 신앙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부요함과 승리할 수밖에 없는 확실함이 복음 자체의 근거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안에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이를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부요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한 대로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기쁨이요 영광이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영광입니다.
--- p.18-19, 「01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일하십니다」 중에서
[조주석] 성화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사례로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 같은 인물을 다루었습니다. 그들도 행함의 문제에서 자기 의라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박영선] 믿음을 조건으로 생각하면 언제나 인과율로 갑니다. 그리고 구원 문제에서 칭의 문제를 따질 때는 믿음하고 행위를 반대 개념으로 보는 잘못을 범하죠. 믿음이란 인과율이 아니고 은혜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데 있어서는 인과법칙이 있지요. 그게 자격과 조건으로서의 인과법칙이 아닌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인과법칙이 있어요. 그러나 그게 운명을 결정하는 인과법칙은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사망을 이기는 부활과 승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종한다는 건 신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신자가 선택할 수 있는 신자의 영광이자 특권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자원해서 성육신하시고 수난을 당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기뻐하심에 성자 하나님이 참여하신 것같이,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겁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그 기쁨과 영광을 누리지 못하죠. 그럴지라도 결과로는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결과를 승리케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조주석] 그래서 잘못하면 신앙의 문제를 규율이나 규정으로 정해 놓고 실천하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일주일에 전도를 두 번 해야 된다”, “성경은 몇 장씩 꼭 읽어야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만일 그걸 다 하면 “아, 내가 신앙생활 잘했다” 이렇게 갈 수 있겠지요. 그러한 위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영선] 규율이 어쨌든 소극적으로라도 행위의 법칙을 강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훈련이라는 개념으로는 옳습니다. 훈련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훈련으로의 성취도를 보는 차원에서 규칙을 정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쓰일 수 있어요. 훈련이라는 것은 성취하는 만큼 기쁨도 있고 자랑도 넉넉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생각이 늘 연결되거든요. “난 너와 다르다”가 되니까 말입니다. 자기 안에 근거를 가지는 만족감이나 확신이 생기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 p.155-156, 「06 성화의 신비는 의존성에 있습니다」 중에서
[조주석] 신앙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의심은 고난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영선] ‘영혼의 밤’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때 그것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 자체란 내가 가지고 있는 방법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론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일하시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 가운데 놓인 사람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순탄할 때는 하나님이 하나님다우시고 내 믿음도 믿음답지만, 현실 속에서 흔들리면 하나님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우리 일반 인생에서도 사춘기가 그런 시기 아닙니까? ‘부모님이 정말 내 부모가 맞나?’, ‘나는 우리 부모의 기대와 목적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자기 생각은 부모의 기대와 다릅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뭐냐고 물으면, 지금은 모르겠고 무조건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춘기라는 시절이 한 인간이 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요? 그런 반발이 없으면 인간으로 성숙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 무엇을 깨우치느냐 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한계를 왜 깨달아야 하느냐 하면, 그 한계가 구체적으로 자기 정체의 실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나는 이 정도에 불과하다고 아는 것이 한계가 아닙니다. 한계란 자신이 실제로 증언하고 행동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실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구별이 안 되고, 사물과 내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관념만 돌아다닐 뿐 실제 인물, 내 자리, 내 몫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 자리란 피아노의 건반 같다고 했습니다. 나를 누르면 그 소리가 나야 합니다. 한계란 그렇게 구체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 자신이 타인 및 사물과 다 합쳐지는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의 찬송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 p.370, 「13 고난, 틀을 깨나간다」 중에서
[조주석] “하나님이 우리한테 권력을 주시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섬김보다는 권력을 요구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박영선] 우리가 큰 교회를 지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적으로 일단 우위에 서고 싶고, 재정적으로 뭘 나눔으로써 어떤 역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가 교인들끼리 일단 위로를 주고받고 결속력을 갖는 교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고 말씀하는 것은 자기 혼자로는 그것을 다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합창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교회로 모인 모든 사람이 수많은 교제 가운데서 그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겪지 않고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참여하고, 사랑을 나누고, 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허락한 삼위 하나님의 교제와 긴밀한 연합에 우리를 이렇게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가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임마누엘이 되어라.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어라.” 그들이 볼 때 어떤 종교적인 특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증인으로 그들 가운데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 p.400-401, 「14 역사,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중에서
[조주석] 설교 행위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설교는 성경의 재료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요리해 내는 일입니다. 때가 되면 라면이라도 끓여 줘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설교자란 전문 요리사라기보다는 가정주부나 엄마와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영선] 설교자는 그 시대의 인물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가 태어나서 설교할 때 청중들과 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가 자신을 청중과 구별시켜 거룩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설교자는 성육신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같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답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나 신앙 상담과 관련해서 자주 쓰는 예화가 있습니다. “식당에 음식을 먹으러 갔는데 쌀, 고기, 야채 등 칼로리가 얼마라고 적힌 식단표는 보이는데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 설교자가 청중에게 어떤 음식을 먹으면 힘이 나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비만이 생기고, 어떤 음식은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만 이야기하고 끝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메뉴판만 보여주고 식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식사가 나온다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고,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밥 한 그릇인 것입니다.
--- p.448-449, 「15 설교, 하나님의 뜻을 인간 현실과 연결하는 것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