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은 다른 사람보다도 선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런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자기들의 소명에 얼마나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가령 이 세상의 타락이 극도에 달한다고 할지라도, 이 이상으로 모든 종류의 치욕들로 가득한 성직자의 품급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런 죄가 없다고 하면서 제가 말하는 것을 논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행은 모두 사람의 눈에 폭로되었으며, 그들의 끊임없는 탐욕과 정욕은 분명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그들의 교만함과 잔인함도 명확합니다. 음란한 춤 소리가 집 전체를 요동시키고, 집안이 도박으로 정신을 잃고, 음주나 노래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쾌락이나 진미를 마치 빛나는 덕(德)처럼 자만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이것 하나만으로도 각별하게 존경받기를 원하고 있는 독신제도, 이것에 얼마나 많은 더러움이 존재합니까? 저는 이것을 폭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침묵함으로써 그것이 개선된다고 한다면, 저는 오히려 숨겨놓고 싶습니다.
--- 「2장」 중에서
아버지께서 모든 지배와 모든 권능과 영광을 부여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그분만을 찬양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종들보다 조금 뛰어나신 단계로 뒤로 물러나 계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래도 저희가 침묵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분의 은혜가 잊혀버리고, 그분의 덕능(德能)이 인간의 망은으로 장사되어버리고, 그분의 피의 가치가 사라져버리고, 그 죽음의 결과가 허무한 것이 되어버린, 다시 말해서 그분 자신보다 무력한 환영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인간의 허위와 오염된 생각에 의해서 왜곡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침묵하며 한가롭게 있어야만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받았음이 분명한데, 만약 우리가 보고도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충격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죄악스런 인내일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불경건한 저주에 의해서 이처럼 질식되어버리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런 은혜는 우리에게 잘못 주어진 것입니다.
--- 「7장」 중에서
결과가 어떠하든지, 저희는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여기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관하여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성령님은 가르침의 충실하시고 확실한 증인이십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전한 진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봉사 사역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듯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으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저희가 돕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완고함과 망은에 의해서 결과가 절망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사가 나쁘게 되더라도,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신앙고백에 충실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는 죽어도 좋다”고 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죽음에서도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죽음이 저희에게 보다 좋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확실한 길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저희의 피가 지금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기 위한 씨앗과 같은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저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10장」 중에서
16세기 교회 개혁의 본질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reformare가 암시하듯이 그것은 “재형성”,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불경건으로 파묻혀버린 원천을 재발견해서, 이를 근거로 현시대의 문제를 새롭게 파악하고 이해하여 교회의 실천적 사역에 적용하는 교회적 작업이다. 그러기에 “교회 개혁”은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를 관통하기 때문에 시대와 동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각 시대를 서로 연결하는 살아 있는 공교회적 진리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개혁이 가지는 보수성의 원천은 교회 신학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런 원천을 견지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한다는 의미에서 개혁적이며 진보적이다. 따라서 비판적 개혁성은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원천에 대한 재발견과 그것에 근거한, 그래서 거룩한 전통에 근거해서 지금 주어진 시대를 풀이해가는 교회의 기본적 사역이다.
--- 「역자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