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자는 “사회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세상과 영원한 긴장관계에 놓인 존재이다”라고 믿는 사람이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주의자는 훌륭한 자아, 훌륭한 개인이 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회에 관한 이미지를 바꾸는 순간, 전체주의 사상 A에서 또 다른 전체주의 사상 B로 간편하게 옮겨갈 수 있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으로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여전히 개인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머리글」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 권리, 웰빙에 대한 욕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힘을 얻어 사회 전체의 풍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를 가짜 개인주의라고 부른다. ‘나’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키워서 ‘내’ 방식대로, ‘내’ 맘대로, ‘내’ 욕망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풍조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물건으로 나타난다. 아파트 평수, 통장에 찍힌 돈, 입는 옷, 몰고 다니는 자동차…… 인생이 아파트, 통장, 옷, 자동차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인 것이다.---「프롤로그」중에서
전통 사회에서 개인이란 존재는 떠돌이 개처럼 위태롭고 처량한 존재였다. 이러한 전통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곳은 유럽이다. 개인이 무수히 등장하기 시작했던 곳도 그곳이었으며 개인주의라는 사상이 확립된 곳도 그곳이었다. 에밀 뒤르켕(Emil Durkheim)이나 막스 베버(Max Weber) 같은 사상가들은 유럽 개인주의의 궁극적 뿌리를 예수에게서 찾는다. 예수는 죄와 도덕을 판단할 때, 행위를 기준으로 따지던 전통 종교를 뒤집어엎고 의도, 즉 동기에 의해 따지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죄인가 아닌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를 행위가 아닌 동기에 의해 따지는 것은 ‘신 앞에 홀로 선 개인’을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행위에 관해서는 사회가 판단하지만, 동기나 의도에 관해서는 개인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동기나 의도는 마음의 영역, 개인의 내면에 속한다.---「없애야 할 존재」중에서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역사는 개인에 대한 박해의 역사였다. 어떨 때는 자신의 영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어떨 때는 권리와 자유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정치 권력 강화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개인은 가차 없이 박해당하고 학살당했다. 떼가 박해에 나설 때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위장한다. 진보, 평등, 평화, 자유, 민중, 국민, 민족, 계급, 신앙, 권력, 정당…… 심지어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 이성과 논리와 도덕성으로 자신을 치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위장과 치장에도 불구하고 떼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두려움이며 질투이다. 패닉에 빠질 때, 질투에 휩싸일 때, 인간은 가장 어리석고 끔직한 떼거리로 타락한다.---「없애야 할 존재」중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볼 수 있듯, 공동체 차원에서 매우 위험한 문제에 대해 전략적 의사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은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지만 위대한 과업 및 위대한 비약으로 이어지는 위대한 선택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지혜와 용기에 바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또한 링컨과 같이 온건하면서도 원칙 있는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다면 위대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때 개인이 희생 제물로 바친 자유, 권리, 행복, 생명은 승리와 번영을 위한 초석이 된다. 그때 자아는, ‘공동체의 필연적 요구’를 인정하고 그에 복종함으로써 자기 자신 역시 하나의 필연, 즉 운명이 된다. 자아가 고치에서 나와 나비가 되는 것이다.---「개인의 조건」중에서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세 번째 유형은 공동체의 횡포와 불의에 대한 개인의 저항이다. 이때 공동체는 사회 전체가 될 수도 있고 조직이나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 직업인들의) 커뮤니티가 될 수도 있다. 이 유형에는 두 개의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불의와 횡포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가장 맹렬한 정치 활동이라는 점이다. 정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이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유비퀴터스 소통이 이루어지는 조건에서는 한 개인이 이슈, 타이밍, 소통을 절묘하게 결합시켰을 때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렇게 맹렬한 정치 활동에 나선 본인은 이 활동에 대해 냉철한 검증과 비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내 활동은 정치적인 게 아니야. 순수한 시민 운동일 뿐이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천만에! 이런 생각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어차피 순진하고 착한 어린 양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먹이사슬 맨 꼭대기에 위치하는 가장 맹렬한 포식자다. 사자의 놀이가 사냥을 위한 훈련이듯, 순수한 시민 운동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정치적인 행위이다. 공동체의 불의와 횡포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이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정치적이란 말인가?---「개인의 조건」중에서
또한 루카치의 주장과 달리,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해방하고 구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 새로운 문맥, 새로운 형태의 문제로 바꾸어내기 위함이다. 우리 선배 세대들은 배고픔, 서러움, 전쟁의 공포를 해결하고, 지금 우리가 사는 ‘새로운 문제가 너무나 많은 개인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사회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 다음 세대는 ‘더 새로운 문제가 더 많아진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대의 비밀이다. 하나의 세대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앉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감히 세상 따위가 구원해 낼 수 있는’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개인의 조건」중에서
유럽은 개인을 탄생시킨 곳, 자아를 해방시킨 곳이다. 그러나 유럽은 개인을 타락시킨 곳, 즉 자아를 파괴한 곳이기도 하다. 이 재앙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해방으로 영광을 이루었고 타락으로 교훈이 된 존재 이것이 유럽이다. 유럽의 재앙이란 멀쩡한 듯 보이는 근대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 ‘개인됨’을 포기하는 질병, 자아가 스스로 ‘자아됨’을 거부하는 질병이 사회 전체에 만연되는 현상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시작된 이 질병은 100년 가까이 지난 19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유럽인들을 좀비로 만들었다. 세계 최강의 과학기술, 군사력, 문화. 지식을 갖춘 유럽 사회에서 개인이 멸종되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는 패권적 국가주의로 무장한 근대적 국가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행복과 이익을 약속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자아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증발해서 자아가 죽어버렸다. 이 질병은 유럽인, 즉 ‘유럽의 개인’이라는 생명체의 유전자 코드 안에 들어 있다.
---「유럽인의 족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