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매사 양보를 해야 하지? 왜냐면 난 중국인이니까. 왜 친구들을 도와야만 하지? 그게 미덕이거든. 그럼, 왜 한마디 찍소리도 못하는 걸까? 거야, 난 교양 있는 여자잖아. 매번 이렇게 많은 일들을 왜 다 처리해야 하는 거야? 내가 능력이 되잖아. 그럼, 왜 화를 안 내는 건데? 왜냐하면 여긴 네 집이 아니거든.
부모님은 중국의 예법과 도덕으로써 나를 가르치셨다. 나는 착실하게 따랐고 또 실천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이길 줄은 전혀 모르는 제대로 헐렁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중국과는 완전 딴판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니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는 만인의 바보로 전락했다.
나는 스스로 아무 잘못도 없다고 여겼으나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 앞에서 비굴한 양놈들 무리 속에서 고결한 중국인의 행동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 어려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무턱대고 양보, 또 양보만 할 뿐이었다. --- 「파란만장 유학기」 중에서
에릭의 나무울타리 안에 톱을 내려놓는데 부엌에서 애니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흔의 나이였지만, 그녀의 노랫소리에는 여전히 사랑의 기쁨이 담겨 있었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호세가 오려면 아직 나흘이나 남았다. 처음에는 나 혼자 이 노인들의 마을에서 지내다 보면 그들의 고독과 슬픔에 물들 것이라 여겼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인생의 끝자락에도 봄이 올 수 있고 희망이 있을 수 있고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생각했다. 이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고집스러운 애정과 삶에 대한 진정성과 지혜가 빚어 낸 기적과도 같은 찬란한 만년이라고.
나는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이다. 인생의 나머지 반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한때 내가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했던 이들에게서, 그 어떤 교실에서도 배울 수 없는 수업을 받았다. --- 「인생 수업」 중에서
나는 호세의 성격을 정확히 안다. 호세는 대단히 반항적인 열혈남아로, 그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었다.
호세가 집을 나설 때면 나는 주머니에 돈을 넉넉히 찔러 주었다. 친구를 집에 데려오면 사막의 변변치 못한 살림이지만 정성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고, 외박을 하고 들어와도 이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양심에 찔린 호세가 설거지라도 하면 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구두를 닦아 주었다.
나는 호세가 ‘우리’ 남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가 하자는 대로 다 따랐다. 게다가 호세는 모든 일에 반항하는 인간이라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날뛰게 풀어 주면 도리어 스스로 올가미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자유를 주면 줄수록 호세는 자유를 마다했고,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우리 좋은 남편’이 되었다. 아마도 호세는 속으로 ‘아내에게 반항하기’ 계획이 나름 성공했다고 믿었겠지만. 우리는 각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의 비위를 적절히 맞춰 나갔고 그러면서 행복한 가정의 토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 「사라진 미카」 중에서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야, 다니엘, 사람은 언젠가 부모를 떠나야 할 때가 반드시 있어. 물론 네 상황은 좀 다르지만 말이야.”
한참을 말이 없던 아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실, 제 친부모님이 아니세요.”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저는 입양됐어요.”
“언제 이 비밀을 알게 되었니? 설마, 네가 잘못 알았겠지.”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비밀이긴요. 여덟 살 때 입양되어 고아원에서 나왔어요. 알 건 다 아는 나이였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다니엘……, 부모님을 그렇게……, 그러니까 내 말은, 부모님을 그렇게 사랑했구나.”
나는 놀란 눈으로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먹은 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울컥해서 다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친부모님이든 아니든 부모님은 다 똑같은 것 아닌가요?”
다니엘이 웃었다.
“그래, 똑같아. 똑같고 말고, 다니엘.”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이 빨간 머리 거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앞에서 나는 한낱 티끌처럼 작게 느껴졌다. --- 「작은 거인」 중에서
나는 당신이 떠나갈 때 사랑의 힘으로 당신을 감동시키려고 했어. 그럼 아마도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내 품에 안겨 다시 잔소리쟁이 마누라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내 방법은 틀렸고 당신은 나를 거의 잊다시피 했어. 게다가 내 편지는 아예 무시해 버렸지.
그날 칼이 날 보러 와서는 당신네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라며 말해 주었어. 세상에 무릇 소인과 여자는 다루기 어려운 존재이니 잘해 주면 불손하게 굴 것이요, 멀리하면 원망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칼의 말을 듣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이야말로 공자님이 말한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가상의 이웃인 캐롤을 만들어 냈던 거야. 자극법을 사용해서 당신을 돌아오게 만들려 한 거지. 지금 그 효과가 입증됐고 난 정말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어.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당신이 지금 이 편지에 쓰인 내 해명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당신은 내가 캐롤의 보살핌을 받고 그녀와 함께 휴가를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캐롤이라는 여자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써서 당신을 돌아오게 만들었지만 이는 확실히 군자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나를 거들떠도 안 봤을 거야!
당신, 전보에 돌아가면 날 가만 안 두겠다고,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했지? 난 대환영이야.
새집에 커튼은 아직 달지 않았고 화초도 심지 않았어.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장인, 장모님께 나는 이미 사명을 완성했다고, 당신을 꼬여 아프리카로 돌아오게 만들었다고 전해 드려. 만일 당신이 여태껏 내가 얘기한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돌아오려 하지 않겠지. 내가 거짓말했음을 내 입으로 밝혔으니 당신은 안심할 테고 우린 끝장을 볼 필요도 없어.
만약 캐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해도 나쁠 건 없어. 왜냐하면 지금 나는 캐롤과 함께 잠수하러 갈 테니까!
당신, 돌아올 거야? 말 거야?
키스를 보내며, 당신의 충실한 남편 호세가 --- 「가출한 아내에게」 중에서
호세에게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두 가지 비밀이 있다. 호세를 흥분시키는 기쁨의 샘이기도 한 이것은, 까놓고 말하자면 사실 뭐 별것도 아니다.
“호세, 군대에서도 하루에 밥 세 끼 먹었어?”
이 요상한 질문 하나만 던지면 이 인간은 바로 걸려든다. 강태공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속임수에 빠진 물고기를 바라본다.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물고기의 입에서 말들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온다. 차렷, 열중 쉬어, 경례를 얘기하는 물고기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눈에서는 빛이 난다. 군대에서의 추억으로 평범한 남편은 마누라 앞에서 돌연 위대한 영웅으로 변모한다. 이 영광스러운 시간은 영원히 후퇴하지 않는다. 듣다 지친 마누라가 이렇게 대갈일성하지만 않는다면.
“그만!”
이제야 천천히 입을 다문다지.
만약 나중에 호세의 정신 나간 수다가 또 듣고 싶다면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한 번 더 물으면 된다.
“호세, 당신 군대에 있을 때 밥 세 끼 먹었어?”
그럼 이 인간은 저도 모르게 이 함정에 빠져들어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 놓을 것이다.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 「플라스틱 아이」 중에서
이튿날 아침 차고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예전 이웃들이 내다 버린 한 무더기의 만화 잡지를 발견했다.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달려든 아이들은 이내 잡지들을 나눠 가졌다.
푸르스름한 잿빛의 산 위에서, 호세와 나만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차 안의 다섯 아이들은 쥐 죽은 듯 만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고기 굽기, 불 피우기, 마른 나뭇가지 줍기는 내가 해 봐도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은밀히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나눠 가진 만화책을 끌어안고선 하나도 재미없다는 듯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맑고 상쾌한 공기, 너른 들판,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에 아이들은 면역 주사라도 맞은 듯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일어나 움직일 마음도 없어 보였다.
마침내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게 분명한 다섯 아이들이 맏이를 대표로 떠밀었다. 맏이는 에헴, 기침을 한번 하더니 아주 공손한 태도로 호세에게 물었다.
“외삼촌, 얼마나 더 오래 해야 돼요?”
“하다니? 뭘?”
“그러니까 제 말은, 음, 음, 그게, 밥 먹고 나면 집에 갈 수 있나요?”
아이는 코를 한번 쓰윽 만지더니 매우 겸연쩍어했다.
“왜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실은, 오늘 오후 세 시에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하는데 우리는…… 우리는 꼭 보고 싶거든요.”
호세와 나는 어이가 없어 서로를 바라보다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플라스틱 아이들이었어!”
--- 「플라스틱 아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