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는 건국과 산업화, 그리고 현재 선진화로 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역사'로 내러티브화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80년대는 특정한 기억만으로 재구성되고, 그 안에 존재했던 알갱이들은 '잊혀지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80년대를 체험했던 개인들에게 당대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간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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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주변에는 학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속된 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컸거나 시골에서 자랐어도 대학을 보낼 만큼 여유가 있었다. 굳이 자랑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항상 부끄러움이, 창피함이 넘쳐흘렀다. 그때 우리가 즐겨 찾던 술집은 '막집'이나 '일번지' 혹은 '물레야', '육교집' 같은 허름하고 퀴퀴한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곳에서 마시고 먹는 술과 안주를 불평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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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파시즘의 감시를 피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공간, 생활, 느낌, 삶의 방식, 지향을 발명했다. 비록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고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그 안에서 사회와 정권 그리고 국가에 반역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학생들이 문화를 만드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저항과 투쟁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만의 가치, 의례, 정체성을 이른바 '적들'이라 불리는 이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운동 문화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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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의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도 존재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주 간 공간들은 선배들이 "짚어 준 곳" 이상이 아니었고, 당구장, 극장, 생맥주 집, 디스코텍 등의 장소는 금기시되었다. 하다못해 인천 월미도를 몇몇이 가더라도 과방 안에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개인의 즐거움이 과방을 지배하는 어떤 정서에 의해 억눌렸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운동가들도 과방 정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있었고, 운동 엘리트들조차 가끔 신촌의 화려한 카페에 몰래 놀러 가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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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문화로서 운동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공동체 안의 다양한 대학생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관계가 사심 없는 관계이자 숭고하고 헌신적이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동지적 관계는 일반 사회의 인간관계와 달리 구성원들에게는 절대적 가치였다. 또한 학회, MT(membership training), 농촌활동, 가두 투쟁 등 프로세스에서 자신들의 의례들을 습관화하고 공통의 운동 문화를 공유함으로써 동지애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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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시기 운동 주체들이 저지른 핵심적인 오류는, 투쟁의 진행 과정에서 대중의 요구가 직선제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는데도 이것을 직선제로만 국한시킨 재야와 학생운동의 제도화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제도화 전략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부문의 폭발 가능성을 스스로 제어하고, 지배 권력과 급격한 대치 상황 아래에서 대중의 무의식적인 힘을 지도의 논리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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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엘리트들은 대중의 목적 없는 즐거움을 민중 공동체와 배치되는 '프티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사고했다. 정형화된 틀 안에서 대중을 만나고 얘기해야 했으며, 대중의 자생적인 의식과 행위를 무시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대중의 내재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런 엘리트와 대중들 사이의 관계는 지도와 피지도 관계로 나타났다. 엘리트는 '생매스'를 교화 대상으로 사고했으며, 낮은 정치의식을 지닌 채 편안함과 안락함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파악했다. 이런 대중의 자생성에 관한 무시는 운동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극을 만들어갔고, 이것은 점차 학생운동 정치의 실천에도 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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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5월에 죽음은 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5월 내내 거리와 집회, 투쟁 현장을 뒤덮은 '젊은 벗의 초상'은 투쟁의 상징이었다. '열사는 싸우고 있다'는 구호로 시작된 기나긴 노제와 밀고 밀리는 거리 투쟁은, 열사의 죽음을 향한 분노에서 시작해 기나긴 분노와 죽음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는 열사보다 전사가 필요하다며 학우들의 불감증을 질타하는 박승희 열사의 절규와 운동과 소박한 일상 속의 신념을 메모장 등에 적어놓은 김귀정 열사의 애잔함은 저항에서 타살로,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운동의 동력이었다. 다시 살아나는 열사들의 죽음은 투쟁하는 자들, 약자들의 무기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죽음과 분신은 투쟁을 지루하게 늘어뜨린다는 불만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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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고 김귀정 열사가 동아리연합회 회장 후보에 나갈 때 사용했던 선거용 사진을 보?, 여성 후보자들은 교복처럼 민복을 즐겨 입었고, 대부분 웃음조차 띠지 않은 채 자세를 고정하거나 한쪽 팔을 치켜들어 선동가의 전형을 재현했다. 이런 한복('민중복')은 대표로서 집중성을 높게 해주어 민족성과 강력한 리더십을 상징했다. 반면 복장에 관한 여성 활동가들의 태도는 '보수적'이었다. 여성 활동가들은 활동하기 편한 바지를 주로 착용했으며, 스커트를 입을 경우 '변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 p.274
91년 5월을 전후로 활동가들의 내면세계에는 소시민성이라고 치부된 '개인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의식적으로 이런 욕망을 밀쳐내면서, 자신을 운동이라는 구조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개인적인 것은 활동가에게는 사치라고 여겨졌으며, 활동가답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시민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던 나는 그저 '청춘을 불사르고 해방을 희구하며' 달리고 또 달리는 사람들의 대열에 시치미를 뚝 떼고 합류하고 싶을 뿐이었다"라고 회고한다.
--- p.304
"죽음이 모두를 영웅으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지배 세력의 열사-영웅화에 대한 훼손 전략은 종결되지 않고, 활동가들의 내면에도 죽음이 드리워졌다. 바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미신은 그렇게 허술한 틈을 쉽게 파고든 것"이었다. 결국 50여 일의 시간 속에서 죽음의 의미는 훼손되었고, 80년대 중반 이후 대중투쟁의 상징이던 '열사-전사' 담론은 자기 한계에 봉착했다. 열사를 영웅시함으로써 투쟁이 지속될 수 있다는 사고가 지녔던 근본적인 한계는 활동가들 자신이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 p.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