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명령과 사랑-명령 사이의 갈등을 인지한 일부 저자들은 정의보다 사랑을 선호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우리의 도덕 문화에서 정의 개념을 제거하자고 하거나, 둘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마다 정의보다 사랑에 우선권을 주자고 하거나, 정의 범주의 사용을 신중하게 한정한 소수의 상황으로 제한하자고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반응하며 사랑보다 정의를 선호하는 저자들도 있다.
나는 이 두 명령 사이의 긴장을 불변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둘 사이에 긴장이 있다는 인식이 곧 두 명령을 잘못 이해했다는 신호라고 주장하려 한다. 두 명령이 서로 온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사랑을 이해하는 길과 정의를 이해하는 길을 제안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는 우리가 모든 이웃을 항상 아가페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정의의 요구에 따라 누군가를 대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의 사례가 아니라고 이해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아가페 사랑이 불의를 저지를 수 있음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아가페주의자들은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면서 그를 불의하게 대한다면, 그렇게 대우받지 않을 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그가 그런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를 그렇게 대우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나에게 그런 식의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면, 나는 그에 대해 그를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 할 상관적 의무를 갖게 된다. 아가페주의자의 관점은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이 때로는 허용된다고 본다. 때로는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조차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을 수가 없다.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 「4장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의 아이러니와 불가능성」 중에서
니버는 갈등 상황에서 사랑이 아니라 정의의 편을 택하라고 말한다. 사랑은 갈등이 없는 상황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가장 힘주어 말씀하신 것은 갈등 상황에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되 그 이웃이 나의 원수여도, 그가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그 일을 뉘우치지 않아도 사랑하라 하셨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 갈등이 없는 상황에서뿐 아니라 갈등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으로 볼 때 니버의 입장은 어딘가 심각하게 비뚤어졌다.
--- 「5장 니버의 비고전적 아가페주의」 중에서
간단히 말해, 신약의 아가페에 대한 이상적 해석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킬 것이다. 첫째, 정의의 요구에 따라 누군가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사랑의 한 가지 사례가 되도록 사랑을 이해할 것이다. 둘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 우리가 흔히 자신에 대해 갖는 사랑, 우리가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그런 통합적 이해에 이르는 길로 이미 상당히 나아갔다. 배려로서의 사랑은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행하는 것을 아우른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는 사랑과 이웃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은 배려로서의 사랑이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을 배려로 이해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 남았다.
--- 「9장 배려로서의 사랑」 중에서
사회적 실체는 거듭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난다. 그것들이 우리를 섬기는 대신 우리가 그것들을 섬긴다. 우리는 그것들이 본질적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복의 범위와 눈부신 재화가 제국의 위대함에 기여한다고 판단할 뿐, 그 정복과 부가 사람들의 번영과 사람들 사이의 정의가 향상하는 데 과연 기여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실체에 본질적 가치를 부여하면 그 실체의 번영 또는 우리가 그 실체의 번영이라 여기는 무엇 자체가 우리 행동의 구조에서 목적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국가·단체·클럽을 섬기게 되어 버린다. J. F.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이 유명한 선언을 했다.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마시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이것은 엉터리 구분이다. 물론 나는 이 나라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대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나라가 국내외에서 사람들의 번영과 그들 사이의 정의에 봉사하는 상황이 조성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 「12장 두 가지 인상 바로잡기」 중에서
용서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은 그리스월드가 분명하게 거부하는 바와 달리, 자신이 당한 잘못에 대한 부정적 감정과 부당 행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구분해야 한다. 부당 행위자를 온전히 용서하면서도 그가 한 일에는 계속 분노할 수 있다. 만족스러운 용서의 이론이라면 이런 까다로운 균형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하고, 이 균형잡기가 필요한(혹은 필요치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누군가를 그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 잘못을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취급하는 것이라고 어떤 저자들은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맞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가 한 일에 대해 그를 봐줄 때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용서는 그 행위를 없었던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 행위자를 그 행위로 인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 「15장 용서란 무엇인가?」 중에서
히브리성서와 기독교성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법을 내리시고 그 법을 어길 시 제재를 명하시는 분으로 제시하며, 그런 법과 제재에 회개-예외가 붙는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참회하는 죄인에게 완전하고 온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분으로도 제시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뢰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나의 논증은, 이것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원리라면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재의 억제적 기능이 훼손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딜레마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하나님의 사법 제도(justice system)는 억제력의 관점이 아니라 질책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그 일에 대한 비난이자 진노의 표현이다. 앞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용서하려면 질책적 형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형벌 포기 자체가 정의를 침해하거나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확인했다.
--- 「17장 용서는 정의를 침해하는가?」 중에서
포도원 주인은 그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관대함을 베풀게 된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관대하게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을 뿐이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선별적 관대함은 그 선택에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이유가 없다 해도 정의로울 수 있다. 일찍 온 일꾼들은 주인이 각 일꾼에게 일한 만큼 지불하고, 굳이 관대함을 보이고 싶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크기의 선물을 하길 바랐다. 노동의 길이와 강도에 선물의 크기를 맞추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방식들을 크게 선호했다고 해도, 주인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한 일이라는 결론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 「18장 정의로운 관대함과 불의한 관대함」 중에서
내 논의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웃에 대한 아가페주의자의 배려에는 이웃이 정의로운 대우를 받게 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아가페주의자는 국가를 상대로 시민들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권리,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권리, 집회의 권리, 재판을 받을(habeas corpus) 권리, 고문받지 않을 권리 등을 보유함을 인정한다. 그는 이런 권리들 및 그와 같은 여러 다른 권리들을 무시한 것이 수 세기에 걸쳐 오도된 사랑과 기형적 배려의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 「19장 정의로운 온정적 간섭주의와 불의한 온정적 간섭주의」 중에서
물론, 나도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간략하게 논하면서 한 말에 대한 라이트의 생각에 동의한다.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믿음이 그들의 디카이오수네로 여겨질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뿐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언약의 내용에 담긴 정의(justice)라고 생각한다. 3장 29-30절에서 바울은 언약의 내용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의롭다 하시는 이유가 그런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라! 바울은 약속의 내용을 지지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 「21장 칭의란 무엇이며 그것은 정의로운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