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당시 개혁가들이 성경적 가르침을 왜곡한 것에 맞서 싸웠던 전통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전해준 귀한 유산을 계승하되 우리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는 태도로 그것을 교정하고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 「발간사」중에서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우리의 관심은 “구원받은 신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나의 믿음은 세상 속에서 이웃을 향해 어떤 선한 행위를 보여줄 수 있는가?”,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신자는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쏠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여는 글」중에서
하나님은 재판을 통하여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는 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런 약자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는 재판이란 그들을 살려주는 구원의 사건이 된다.
--- 「01 | 칭의론과 정의」중에서
“행위 구원”의 본질은 결국 사람이 행한 악과 선의 대차대조표를 따져서 그중 더 많이 남은 것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다. “행위 구원”이라면 그의 이제까지의 의로운 행실이 반드시 제 역할을 하고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가져와야 하겠지만, 에스겔서 본문은 그런 과거의 의가 현재의 악인을 결코 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 「02 | 구원과 정의, 그리고 의롭게 됨의 길」중에서
책임 있는 신학은 교회의 현실에 대한 뼈아픈 관찰과 반성에서 출발한다. 교회의 타락은 신학의 실패, 혹은 무의미함을 의미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갈 때 우리의 과제는 자신이 견지한 신학적 처방의 올바름을 강변하는 아니라,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 「03 | 구원과 신자들의 행위」중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의 믿음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는 것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통한 칭의도 강조한다. 의롭게 됨의 객관적이고 종말론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이며 실존적 수단은 인간의 믿음의 행위다.
--- 「04 | 칭의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중에서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다루되, 신학적 논쟁의 태도가 아니라 포용적 대화와 경청의 자세로 접근할 때가 되었다. 이를 위해 이제는 우리만의 칭의론을 무한 반복 재생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학 전통과 교리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다가서는 모습이 요청된다.
--- 「05 | 가톨릭 칭의론」중에서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는 루터가 “오직 믿음”을 외쳐 “행위” 없는 교회가 출현했다며 그를 탓하는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정작 루터는 이런 시시비비에서 소외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인 성령을 중심에 세워놓고 참된 믿음과 참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때문에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 「06 | 루터의 칭의론 재조명」중에서
이런 점에서 칭의론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시키는 정의(restorative justice)이며, 화해의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용서를 경험한 자들은 공공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사회정의를 향하여 전진한다.
--- 「07 | 종교개혁 칭의론의 사회·경제적 해석」중에서
아나뱁티스트의 칭의론의 특징인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강조와 인격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은 그들의 핵심 신념과 전통인 제자도, 세례와 성만찬, 믿음의 공동체라는 특징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 「08 | 아나뱁티즘의 칭의론과 정의」중에서
웨슬리는 구원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했고 그 과정에서 칭의가 중생 및 성화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었기에 이 글에서는 칭의와 함께 구원의 각 단계와 과정들도 살피게 된다.
--- 「09 | 존 웨슬리의 구원론」중에서
특별히 바르트의 신학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고찰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르트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정의를 앞세웠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치열하게 논쟁함으로써 펼친 신학 안에는 그 문제에 관한 신학적 대답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트의 신학적 발전 과정 자체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정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증법적인 싸움을 몸으로 살아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10 |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정의」중에서
적어도 공동선언문은 복음과 삼위일체를 선행조건으로 삼으면서, 인간이 성령의 역사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따라서 복음을 수용하는 것이 “이신칭의”라고 천명한다. 따라서 나는 “이신칭의” 교리가 복음을 수용하는 탁월한 신앙 항목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에큐메니컬 교회들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신앙 항목들과 각 개신교파의 신앙고백서들에 나타난 신앙 항목들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 「11 | 칭의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에 나타난 칭의와 성화」중에서
왜 칭의와 정의는 연결되지 않는가? 그것은 칭의는 구원 개념이고, 정의는 윤리 개념이라는 전제 때문이다. 그리하여 “칭의와 정의”, 즉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정의”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철저히 고민되지 않았다.
--- 「12 | 칭의와 정의」중에서
칼 바르트 이후 많은 현대신학자와 기독교윤리학자 가운데 칭의와 정의를 연결하여 사고하려는 신학적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신학과 기독교윤리 분야에서 칭의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사회정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진지하게 성찰하였던 본회퍼, 몰트만, 볼프강 후버와 월터스토프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 「13 | 현대 기독교 사상에서 칭의와 정의」중에서
정통적 칭의론의 가장 큰 약점은 그것이 바울 서신 후반부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권고와 연결되지 않는 것에 있다.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만큼 의롭게 되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믿음보다 그것에 충성하는 삶이 더욱 요구된다. 제닝스의 정의론적 해석은 바울의 공동체와 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인 “정의”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 「14 | 정의의 관점에서 읽는 바울의 칭의론」중에서
칼뱅도 구걸 행위를 금지하였고, 체계적으로 조직된 디아코니아를 수행하였다. 교회의 복지 시설인 구빈원에서 일하는 자들은 병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들을 먹여주었다. 구빈원 집에 속하는 것은 구빈원, 페스트 병동 그리고 불쌍한 자들이 거하는 숙소다.
--- 「15 | 칭의론과 디아코니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