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통해 현실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출신, 학력, 권력, 재력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익힐 특권도 받는다(창 1:26-27). 우리의 삶의 무게중심이 신학이 펼쳐 놓은 낯선 세계로 옮겨지면서, 지금 이 세계를 장악하는 힘과 논리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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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신학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못된 개념-여러 가지가 뒤섞인 해롭고 낡은 개념-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7) 따라서 신학 공부는 자기 안에 자리 잡았을지 모르는 암묵적인 신학을 성찰하고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 p. 33
“하나가 셋과 같다거나 셋이 하나와 같다는 식의 숫자 놀음으로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는 산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께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방식이다.”15)
--- p. 114
계시가 없다면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바로 깨달을 수 없다. 또한, 계시 없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나는 나 자신에게마저 이방인일 뿐이다.8)
--- p. 123
성서와 우리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강박적으로 성서를 현대 상황에 적용하려 노력하면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성서를 통해 이야기하게 된다. 성서의 ‘적용’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 p. 130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 특별히 근대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인간들을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우주의 기원을 알려 주신 결과물이다. 창세기는 그 자체로 완결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신앙 속에서 성숙하고 자라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답고 지혜롭고 권위 있는 설명이다.
--- p. 167
지금도 창세기는 여러 정신적·물리적 억압의 사 슬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에게,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 시며 ‘너’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행복하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알려 주고 있다. 이처럼 창조론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 적 보고로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는 생동적인 교리라 할 수 있다.
--- p. 179
반면 성서의 섭리론은 우주의 원리로서 신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 이신 하나님을 더 크게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 계약을 성취하고자 스스로 계약에 자신을 묶으신 분이다. 그렇기 에 하나님의 섭리는 ‘계약과 성취’라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 야 한다.3)
--- p. 187
특히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뜻은 구원 계획(롬 9:19), 구원을 위한 부름이나 십자가(행 2:23; 히 6:17), 성화의 삶(살전 4:3, 5:18; 벧전 2:15) 등과 결부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진 정으로 기뻐하시는 바이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는 그분 의지의 은혜로운 표현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일상에서 경험하게 될 어떤 구체적 사건을 하나님의 뜻이라 부르는 데 조심을 해야 한다.
--- p. 198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 자체를 향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무조건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변화와 성장을 도모한다. 그렇기에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에게는 자아가 변하는 고통을 일으킬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위험에 자신을 노출하고, 그 오명을 인내하고 감수하는 신실함을 요구한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시면서 인간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역설적 영광’을 봐도 알 수 있다.
--- p. 214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양심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으려는 생각의 무능은 결국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초래한다. 그렇게 악은 순진하고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찾아온다. 주관적 희로애락 감정에 중독된 일반인, 폭력과 부정의에 길들여진 조직, 경쟁과 약육강식 원리에 잠식된 종교, 학문으로 권력과 재물에 봉사하는 지성인, 무책임한 대기업과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정치, 이 모두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 p. 239
그런데 지난 2,000여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많은 신학자나 철학자가 하나님은 본성상 고통을 당할 수 없기에, 우리의 아픔을 나눌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해 왔다. 여기에는 신은 타자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자족적 존재’라는 독특한 철학적 전제가 깔려 있다.
--- p.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