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허무주의와 나르시시즘에 빠진 현상은, 신적 계시를 믿어서 얻는 그런 지식과 구별되는 확실한 지식을 추구한 결과로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서 있는 이들은 이 이야기가 그리 놀랍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비롯한 만물의 창시자라는 입장이 옳다면, 그와 다른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지식은 모두 혼돈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지닌 권위보다 더 앞서고 더 기본적인 권위를 찾으려는 노력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p.18
“신약성경이 거듭해서 증언하듯이, 실로 이 새로운 창조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 새 창조의 창시자는 필연적으로 궁극적 권위일 수밖에 없다. 그 구세주의 권위를 입증할 만한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는 일은 그 구속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근대적’ 지식에 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줄 알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충돌을 도무지 피할 수 없다. 이 계시의 권위를 수용할 만한 근거를 다른 데서 찾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 권위를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 그 자체를 전하는 일이다.”--- p.26
“...오직 의심될 수 있는 진술만이 실재와 접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믿음의 문제다. 또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한다. 우리가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알려진 것처럼 장차 알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건만, 그보다 더 믿을만한 확신의 근거를 주겠다는 자연신학은 믿음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믿음을 뒤집어엎고 있다.”--- pp.30-31
“따르는 행위는 믿음의 행위이지, 부르는 자의 지적인 신뢰성과 그에 따른 가능한 결과를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합리적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인간 존재를 둘러싼 총체적 신비를 이해하는데, 이 인격적 초대보다 더 믿을 만한 실마리가 있다고 추정하는 그런 철학이 과연 믿을 만한지 그 철학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p.32
“...성경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책이고, 그 공동체는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이다. 성경과 공동체,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만큼 어느 하나를 이해하지 않고는 다른 하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전통은 성경과 동떨어진 권위의 원천이 아니다. 누구든지 전통에 충실한 입장을 유지하려면, 오직 성경 ‘안에 머무를’ 때에만 가능하다.”--- pp.66-67
“...인격으로서 상대방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면 나의 통제권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귀를 기울이고, 질문에 나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처럼 통제권을 포기하고 질문을 받는 위치로 옮긴다고 해서, 이성의 사용을 그만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성적 판단을 내리고 자료로부터 이성적 결론을 끌어내는 이성적 사람이다. 양자의 차이점은 이성이 어떤 역할을 하도록 요구받느냐에 있다. 이성은 주인노릇을 하는 자율성의 종이 되는 대신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하는 열린 마음의 종이 된 것이다.”--- pp.74-75
“그러므로 경험을 기독교 신앙을 위한 별도의 권위의 원천으로 취급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우리가 겪는 경험의 성격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믿음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특별한 종교적 체험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그런 것이 때때로 귀하고 필요하긴 하지만), 믿음으로 행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바로 이 길이 진정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모든 종교적 체험은 그 하나님을 흘끗 보는 것에 불과하다-인도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p.80
“따라서 우리가 그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복음의 권위를 단언하려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삶과 예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몸소 살아내는 일 밖의 다른 길이 없다. 이는 우리가 소위 ‘객관적 진리’의 개념을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개인적으로 개입되지 않는, 그런즉 우리의 전 생애를 헌실할 필요가 없는 그런 일련의 초시간적 명제들 안에서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이 진리 그 자체이신 그분과 더불어 제자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데만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