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은 발정하지만, 인간은 유혹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은 오유미. 태생부터 불행을 타고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 단지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욕망과 성공과 복수를 위해 유혹의 전략적 기술을 쿨하면서도 뜨겁고 자유롭게 구사한다.
솔직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유미의 행보가 나도 궁금하다. 다만 오유미가 욕망의 종결자, 유혹의 종결자가 되었으면 싶다는 바람뿐.
성능 좋은 진공청소기처럼 강한 흡인력으로 독자들을 내 소설로 한바탕 빨아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작가는 독자를 글로 유혹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작가다. 그런데 여기에 수식어가 붙어야 한다면 나는 ‘영원한 처녀 작가’이고 싶다. 나는 무엇이든 쓰겠지만, 내가 내는 책은 늘 ‘처녀작’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험으로 내게도, 독자들에게도 낯선 작품을 쓰고 싶다. 내 안의 ‘처녀’가 나를 끊임없이 유혹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맛있는 섹스는 있어도, 맛있는 사랑은 없다. 사랑이 허기라면, 섹스는 일종의 음식이다. 이 도시에 음식점이 넘쳐 나듯 사람들은 여러 메뉴를 놓고 고민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맛있는 음식이 꼭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맛있기도 한 음식에 사람들은 안도와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나 미식가라면 먹음직스럽진 않으나 맛있는 음식을 탐색하는 데도 모험심을 발휘할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는 탐식가다. 게다가 맛있는 걸 절대로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만족한 섹스 후에 남자들이 하는 말은 딱 두 마디로 집약된다. “으음…… 맛있어.” 그리고 곧바로, “딴 놈이랑 하면 죽여.” 그런데 ‘맛있는’ 여자들은 딴 놈이랑 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대체로 맛있는 여자들은 딴 놈이랑 하다 걸리지 않을 만큼 영악하기도 하다. 그건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그녀들의 노하우일까?
유미(由美)는 자신이 ‘맛있는’ 여자라는 걸 안다. 오랜 학습의 결과다. 딱 100명의 남자와 섹스한 건 아니지만, 백분위 점수로 환산한다면 90점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섹스는 일종의 피드백이다. 또한 과격한 섹스 행위는 레슬링과 닮았다. 그런데 레슬링과 다른 점은, 승률을 결정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는 유혹적인 먹이에 곧바로 제압당하게 된다. ---‘1권’ 중에서/pp.9~10
자고로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했다. 요즘 한창 뜨는 인기 드라마에서 주인공 미실도 그렇게 말했다. 고대에나 현대에나 색을 잘 쓰는 여자는 남자를 정복하게 되어 있다. 미실에게 수천의 화랑과 군사가 있었다면, 21세기의 유미에겐 자신의 블로그로부터 파생된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가 있다.
미실처럼 족보가 복잡한 관계는 싫다. 그래도 여자에게 무지개 같은 연애는 이상적이다. 요일별로 색다른 7인 7색의 섹스. 남자들은 힘들어도 여자들의 몸은 그게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 있는 현대 여성이라면, 일과 사랑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책상다리처럼 안정감 있는 넷도 괜찮다. 아니, 옛날 무쇠솥의 다리처럼 셋까지도 나쁘지 않다. 유미는 늘 최소한 다리 셋은 고수하고 있다. ---‘1권’ 중에서/pp.24~25
나는…… 사랑을 믿는다. 아니, 어쩌면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믿고 싶다. 간절하게……. [사랑밖엔 난 몰라]라는 주제가를 부르며, 배 째라고 누워 있는 ‘청승 가련형’ 여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유미의 인생이야말로 역사소설, 즉 소재는 몸이고 주제는 사랑의 투쟁사 아니었던가. 지나간 역사는 나름대로 교훈을 주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1권’ 중에서/pp.232~233
유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메두사처럼 산발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유미는 그 여자를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한없이 깊고 고독한 눈빛의 여자가 슬픈 듯 서 있었다.
“넌 누구니?”
“난 유미(由美)야.”
“나쁜 년!”
“난 죄 없어. 모든 건 유미(由美), 아름다움에서 말미암은 거야.”
“아름다움이라고?”
“응.”
“넌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무기를 가졌을 뿐이야.”
“그건 타고난 재능이지, 내가 선택한 건 아니야.”
“잘난 척하긴!”
유미는 거울 속의 여자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속이 좀 후련해졌다.---‘2권’ 중에서/pp.49~50
인간은 참 적응력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도 일방통행이다. 좋은 방향으로는 적응이 빠르지만 역방향은 끔찍하다. 이제 웬만한 차는 못 탈 거 같다. 인간의 욕망은 호리병이다.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뺄 수는 없는 게 욕망이란 놈이다.---‘2권’ 중에서/p.72
유미는 욕망의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생에 대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디로든 달리고 싶은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해.”
동진이 속삭였다. 그 말이 마치 당근이라도 되듯이, 아니 휘발유라도 되듯이 유미의 온몸이 다시 충전되었다. 동진이 다시 시동을 켜고 밀고 들어왔다. 그래, 달리는 거야. 온몸의 세포가 생생히 아우성치는 이 살아 있는 삶의 순간을 느끼는 거야. 사랑은, 생은, 다시 올 수 없는 순간들의 질주일 뿐이다. 아아, 카르페 디엠(Carpe diem)! ---‘2권’ 중에서/pp.83~84
여자가 사랑 때문에 섹스를 한다는 건 남자들의 이기적인 오해다. 여자들의 욕망은 여자들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어느 책에서는 여자가 섹스를 하는 데 237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유미는 이유도 없이, 아니 수많은 이유 중 하나겠지만 오늘 밤 동진을 간절하게 맞이하고 싶다.
그런데 수익과 오늘 밤 잠정적으로 만날 약속을 했던 게 떠올랐다. 윤 회장과의 만남 이후 수익과 만나기로 한 걸 계속 연기했던 터였다. 수익이 너무 쉽게 유미를 장악하고 간섭하려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충만한 연애란 두 사람 간의 거리 두기와 묘한 함수관계에 있고 그 균형을 잘 조절하는 건 여자의 현명한 재능이다. 조두식도 말하지 않았는가. 줄 듯 말 듯 꼬리 치라고. 사실 꼬리 춤은 주고 난 후에 더 잘 춰야 하는 법. 남자는 주고 나면 무조건 다 제 건 줄 아는 미련한 짐승이니.---‘3권’ 중에서/p.48
눈을 뜨니 동진이 바닥에 앉아서 잠들어 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5시가 넘었다. 유미는 동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와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와 내연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주제가가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유미는 피식, 웃었다. 욕망이라는 것은 눈 가린 경주마 같다. 너무 맹목적이다. 욕망의 길은 일방통행이다. 한 번 시동을 건 욕망은 브레이크가 없다. 고로 욕망은 위험하다. 하지만 유미는 다시 생각한다. 여기서 멈추는 건 더 위험하다고.
---‘3권’ 중에서/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