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언론계, 정치계, 학계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힐러리 클린턴(Hillary ‘Rotten’ Clinton) 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는 건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다가 트럼프 당선이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지자 유색인종, 성소수자, 무슬림, 유대인, 여성, 이민자 등 온갖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는 긁어모아서 모조리 혐오하는 인종 말단이 대통령이 됐다고 호들갑 떠는 미국 주류언론의 가짜뉴스에 잠시 관심을 보이다가, 천박하고 격조 없기 이를 데 없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은 상스럽고 무식한 인간들이 틀림없다며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아무런 심층 분석도 복기(復碁)도 반성도 없었다. --- p. 5
‘정치적 정도’라는 용어의 역사는 20세기 초 러시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린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른 혁명동지들을 제치고 소련 당권을 장악해야 했다. 레닌은 혁명운동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혁명이론이 있어야한다고 보았고 객관적 지식과 진실은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편견이므로 이를 거부하고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 충실해야한다는 논리를 정당 정신(politicheskaya partiinost, political party spirit/truth)으로 규정했다. 레닌은 권력을 유지하고 목표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정당 정신’을 두고 당내에서 갑론을박과 내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당 노선인 정당 정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이념적 순도와 정통성을 뜻하는 정치적 정도(politicheskaya pravil’nost’, political correctness)를 내세웠다. --- p. 14
오늘날 반인종차별주의(anti-racism), 페미니즘(feminism), 구조주의(structuralism),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등 온갖 “이념(-isms)”이 학계, 문화계, 언론계, 정치계 등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고 이러한 도그마는 인간의 언어, 사고,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소련이 반체제인사들을 정신병자 취급했듯이, 이러한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므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단순히 국가권력이 폭력을 행사하고, 사상을 검열하고,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고 전체주의가 아니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사적인 견해나 관점을 지니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된 정신 상태를 말하며 사람들이 이런 상태가 되면 독재자 한 사람이 모든 걸 통제하지 않아도 사회는 전체주의화 된다. --- p. 35
2011년, 브라잇바트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워싱턴 정계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공화당 후보들이 2퍼센트 3퍼센트 지지율을 면치 못하고 허덕이고 있을 때,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나라에서는 유명인이 최고다.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언론을 가지고 놀았듯이 언론을 맘대로 주무르는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면,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 주기에 맞춰 언론을 가지고 놀듯이 언론을 주무르는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면, 공화당에서는 아마 유명인사가 후보로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앞날을 예견한 듯한 발언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브라잇바트 뉴스(Breitbart News)]의 회장에서 물러나 트럼프의 선거본부장으로 활약한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을 백악관 전략참모로 임명했다. --- p. 305
1971년에 출간된 얼린스키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수칙: 현실적 급진주의자를 위한 실용적 입문서(The Rules for Radicals: A Pragmatic Primer for Realistic Radicals)》는 위와 같은 기만전술들이 가득한, 사실상 신좌익의 선언문(manifesto) 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책은 세상을 현상(現狀)에서 당위(當爲)로 바꾸려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군주론(Il Principe)》이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가진 자들에게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제시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못가진자들에게 그 권력을 빼앗는 비결을 제시해준다.” 자칭 급진주의자인 얼린스키는 세상을 “가진 자(Haves, 상류층과 중산층)”와 “못가진자(Have-nots, 빈곤층)”로 양분하고 권력과 부의 재분배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공동체 조직화(community organization)” 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얼린스키는 게릴라전술과 시민불복종을 통해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사이의 권력의 격차를 메워야한다고 주장했다. --- p. 360
20세기 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역사의 종착역이라며 서구문명의 손을 들어주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새뮤얼 P.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이 오늘날의 세계를 훨씬 정확히 예측했다. 헌팅턴은 이슬람이 다른 문명과 접촉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폭력이 발생한다며 이슬람의 경계(境界)는 피로 그려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냉전(冷戰)은 오래전에 끝났다.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서구 진영 내의 좌익은 냉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하부구조인 경제영토를 공략하는 지상전(地上戰)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작전상 후퇴한 뒤, 상부구조인 학계와 문화계 영공을 공략하는 공중전(空中戰)으로 전략을 수정했으며, 결국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정신적 요새를 구축했다. 그리고 제공권을 장악한 좌익은 이제 지상전을 재개했다. 한편 서구진영의 우익은 좌익이 이미 퇴각한 지상전에서 부전승(不戰勝)한 기쁨에 도취되어 그들이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이제는 재개된 지상전에서도 밀리고 있다. 그리고 서구진영의 좌익은 이번에는 극좌 전체주의가 아니라 극우 전체주의와 손을 잡고 무차별적으로 제3세계 이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서구문명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다. 서구문명이 문화적 자살로 생을 마감할지, 아니면 이 문화전쟁이 열전(熱戰)으로 확대될지, 열전으로 확대된다면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미지수다.
--- p. 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