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마지막 옛 모습’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큰 느낌을 준다. 올드카로 대변되는 변하지 않은 풍광이 정말 아름답다. 1950년대, 심지어는 1920년대에 생산된 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거리는 영화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귀에 익숙한 복고풍의 음악들이 어디를 가든 넘쳐난다. ‘노스텔지어’는 무죄이며 이상하게도 쿠바에서는 더욱 로맨틱하다.
‘큰 변화를 앞둔 나라’, ‘자본주의화의 기로에 선 나라…’
지구의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대부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유독 쿠바의 변화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좀 다른 느낌이다. 변화를 안타까워하고 그 모습을 간직하기를 바란다. 왜 그럴까?
거리 곳곳에서, 대중음식점에서 쉽게 음악을 만날 수 있다. 연주자의 연령도 다양하고 장르도 다양하며 다루는 악기도 천차만별이다. 룸바, 손, 아바네라, 트로바, 단손, 볼레로, 맘보, 차차차… 음악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많은 장르의 음악들이 모두 쿠바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그것이 이 나라,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싱싱하게 살아서 이방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본다면 유행이나 돈벌이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타를 간신히 들고 있는 것만 같은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 기타리스트부터 갓 턱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젊은 가수까지 세대를 초월하여 즐기는 음악을 설명하기에는 유행이란 잣대가 적절하지 않다. 팁을 주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에서는 돈벌이라는 말도 무색해진다.
이래도 되나? 사회주의 나라인데? 국가가 정해준 직장에서 할당된 책임량을 달성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골수에 박힌 고정관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바에 머무는 날이 늘어날수록 그 여유와 자유로움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갔다. 무엇보다 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참 자유롭고 여유가 있었다. 억지로 꾸민 표정이나 모습이 아니고 영혼이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단지 음악을 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같은 느낌이 풍겨 나왔다. 창조적이고 다양한 음악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쿠바는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린 사람의 눈에만 이상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랬다!
쿠바의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익숙한 듯, 특별한 음악들은 쿠바라는 독특한 사회를 상징하는 쿠바의 아이콘이었다. 쿠바의 음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쿠바만의 정체성, 그것을 만들어낸 쿠바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쿠바의 다른 모습이었다. 돈과 권력, 또는 말초적 욕망 따위가 삶의 크고 작은 목적이 되지 않는 사회, 그래서 인간의 욕구가 좀 더 차원이 다른 곳을 향할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을 음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쿠바의 아름다운 풍광만이 아니라 인류사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쿠바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오랫동안 꿈에 그렸던 쿠바, 꿈꿨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팔불출’
‘어리석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우린 이런 자학적인 이름으로 꽤 오랜 세월을 함께해 왔다.
‘지리 팔불출’…,
‘지리 바보’보다 한 등급 위 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지리가 우리의 삶이 된 지 35년, 수준 높은 학문의 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했지만 어쩌다 보니 얼추 ‘지리 팔불출’이 되었다. 사랑해서 지리학을 선택했는지, 가르치다 보니 사랑하게 됐는지는 우리도 잘 모른다.
쿠바가 더욱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곳에 ‘우리’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81학번 동기들이니 35년 지기다. 동문수학한 동기들과 35년 세월을 함께 했으므로 친형제 이상의 연대감이 있다. 같은 눈을 가진, 더구나 35년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함께 하는 답사는 언제나 ‘최고’였다. 그리고 쿠바는 그 중에서 최고였다. 그 느낌을 모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쿠바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가 되었다. 쿠바에 대한 객관적 정보는 책을 펼칠 필요도 없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게다가 우린 글을 써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러니 우리의 짧은 글쓰기 실력으로는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일기’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지리학도의 주관과 편견이 담긴 쿠바 답사기로 가닥을 잡았다. 삼십여 년 아이들을 가르친 지리교사의 눈으로 보는 주관적 답사기로. 지식이 거의 공개되어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감정, 느낌이다. ‘지역적 방법’, 또는 ‘계통적 방법’ 따위의 거창한 욕심은 일찌감치 접어두고 일정대로 가면서 보고 들은 얘기를 좌충우돌 써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은 겨우 열흘 남짓, 몇 달씩 쿠바를 여행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맛보기에 불과할 수도 있는 답사기를 책으로 낸다는 것은 무모한 망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일곱 명이 같으면서도 다른 눈으로 쿠바를 봤다. 그러므로 어쩌면 70일짜리 답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용기를 냈다. 그리고 35년의 세월에 한 권의 책 정도는 함께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동의 욕심으로 서로 용기를 북돋웠다.
출발 전에 함께 답사 자료집을 만들었다. 답사 지역을 세분해서 분담을 하고 자료를 뒤지다 보니 여전히 우리의 핏 속에는 나이를 뛰어넘는 지리학도의 열정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행복한 경험이었다. 티격태격 소박한 자료집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언감생심 답사기를 꿈꿀 수 있었다.
웹으로 문서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함께 글쓰기를 했다. 답사하면서 거칠게 기록한 기본 텍스트를 웹에 올리고 모두가 수시로 들어와서 첨삭을 하는 방식이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로그인을 하여 내용을 읽고 자기 생각을 넣는 것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무척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친구의 다른 눈을 확인하는 재미가 무척 쏠쏠했으며, 잊었던 것들이 복원될 때 마다 ‘다수의 아름다움’에 감동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가장 큰 재미였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과정은 천상 ‘탐험대장’이라는 거창한 임무를 맡은 나의 몫이었다. 우연히 여행 추진을 맡았던 내게 친구들이 일을 잘 시켜먹을 요량으로 붙여준 이름이었다. 다양한 목소리를 정리하다 보니 나의 무딘 감각이 자꾸 본색을 드러내었다. 울툭불툭 봄 새싹같은 생생한 이야기들이 도식적인 나의 잣대에 벽돌처럼 성형이 되었다. 이참에 친구들에게 사과를 하고 가야겠다. 생생한 목소리를 다 담지 못해 미안하다고.
35년 지기들의 소중한 추억으로 삼겠다. 누가 읽어주지 않더라도 우린 이것만으로도 매우 행복하다. 그래도 혹시, 지리학도로서, 지리교사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눈이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의 요소가 될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이겠다.
그리고,
쿠바의 아름다운 변화를 기대한다. 사람을 존중하고, 예술을 사랑하며,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간직하면서 생산성이라는 자본주의 요소를 잘 이식하는, 낡은 건물과 오래된 차가 경제적 잣대로 평가절하 되지 않는 변화 말이다. 그래서 이념이 달라도 인간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본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가치판단을 좌우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쿠바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변화가 지구 전체에 희망의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의 동쪽 끝 한반도에도 훈풍이 불게 했으면 좋겠다.
35년 지기들을 대신하여, 탐험대장 임병조
--- 「머리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