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인가?”
이 책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실패한’ 인생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사람들의 삶을 닮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설교 시간에 이들의 인생을 많이 비판하고 우리가 닮으면 안 되는 모델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설교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제가 그렇게 비판하고 정죄하던 그 모습들이 바로 저의 인격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의 민낯과 못난 모습을 보여 주는 거울이 보기 싫듯이, 나를 너무나 닮아 있는 그 모습들이 저는 불편하고 싫었나 봅니다. 그래서 유독 그들을 비판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 「프롤로그」중에서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다음에 나타나는 가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는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나서 안색이 변했습니다. 얼굴을 숙임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얼굴을 들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숙이고(원어에 근거해서,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눈을 내리깔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보입니다. 인내심이 많은 농부, 가인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이 드린 제물을 받지 않으셨으면 가인은 회개하고 돌이키면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부분을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 「1. 가인: 감춰진 폭력성」중에서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한 장면입니다.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주인의 갑질에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주인에게 험한 소리를 들으면서 일을 해야 하고 인격적인 모욕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힘들어서 이젠 안 되겠다고 생각한 아르바이트생은 식당 일을 그만두겠다고 주인에게 말하고 식당을 나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식당에 손님의 자격으로 들어갑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이번에는 자신이 손님으로서 식당 주인에게 갑질을 합니다. 음식이 왜 이러냐는 둥 맛이 없다는 둥 불친절하다는 둥 온갖 트집을 잡습니다. 손님은 왕이기에 식당 주인은 꼼짝없이 그 갑질을 견뎌야 했습니다. 성경에도 갑질을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라반입니다.
--- 「2. 라반: 숨길 수 없는 갑질 본능」중에서
모세의 말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언제쯤 이 개구리들이 임금님과 임금님의 궁궐에서 물러가서, 오로지 강에만 살게 하여, 임금님과 임금님의 신하들과 임금님의 백성이 이 재앙을 피할 수 있게 기도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바로가
대답합니다. “내일이니라”(출 8:10)
왜? 왜 내일입니까? 지금 당장 기도해 달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개구리로 인한 불편이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멘호텝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내일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기다림과 기대감의 대명사일 수 있지만, 반대로 영원히 오지 않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의 특징은 ‘내일부터’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하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짐과 결심이 아닙니다. 하지 않겠다는 고집입니다. 고집을 부리는 한, 공부를 하겠다는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오늘이 아닌 내일로 시간을 연장하고 고난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고집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3. 바로: 영적인 문제, 고집」중에서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사울, 민심이 천심이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는 민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시대에 최고의 지도자가 아닙니까? 백성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백성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사울은 참으로 그 시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앞서나간 소통(疏通)의 지도자가 아닐까요? 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시대에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은 백성이 보기에는 얼마나 답답하고 미련한 불통(不通)입니까? 아마도 이 시대에 사울과 다윗을 후보자로 놓고 대통령 선거를 하면 사울이 당선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부하의 아내와 스캔들을 일으킨 다윗에 비하면 사울은 깨끗한 지도자 아닙니까? 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울과 그 세 아들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 줍니다. 충분히 해피엔드로 끝날 수 있었던 사울의 삶이 비극으로 마감된 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뜻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인정 중독에 매달린 그의 삶을 요약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삼상 28:15).
--- 「6. 사울: 인정 중독」중에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를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핍박과 고난을 받는 의인, 악한 무리에게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 그럼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신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 바로, 사울, 느부갓네살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악인, 의인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히는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나도 요셉의 형들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도 사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엘리야가 아니라 아합일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살아야 겸손할 수 있고, 건강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 「8. 아합: 흐려진 분별력」중에서
부끄럽지만 우리는 ‘게하시’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지난 주일 설교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잊어버리고 한 주를 삽니다. 그 이유는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삶을 분리해서 살아갑니다. “문제 제기에는 귀신, 문제 해결에는 등신”이라는 듣기에 거북한 말이 있습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 사회가 점점 그런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광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지 않고 현상만 보면서 답답해하고 불안해합니다. 게하시는 죽은 이에게 지팡이만 놓으면 살 줄 알았습니다. 우리도 교회만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압니다. 물론 교회에 나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오는 것은 시작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 「9. 게하시: 무능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