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트뱅은 길게 뜸을 들인다.그는 뜸의 거장이다. 그는 오직 소심한 사람만이 뜸들이는 걸 겁내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면서 ,성급히 엉뚱한 문구들을 내뱉어 조소를 자초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다.퐁트벵은 매우 장엄하게 침묵할 줄 알며 은하수조차도 그의 침묵에 감명받아 초조히 그 대답을 기다릴 정도이다.
--- p. 32
웬 사내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 p.48,---pp.11-17
우리는 쾌락 안에서 쾌락을 위해 살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주의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가? 그 희망은 존재하고 있는가? 적어도, 그 희망의 여린 빛이나마 존재하고 있는가?
--- p.167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 현재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 자신의 아내, 자신의 아이들, 자신의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 p. 6
속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 이 방정식에서 우리는 여러 필연적 귀결을 연역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더 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 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 p.158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 p.6-7
사실, 나도 자문해 본다. 그 숭고한 지상의 역사적 시사가 그의 이마에 해준 입맞춤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시사 추종자들이 곧잘 틀리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역사가 연출하는 상황들이 단지 최초의 몇 분만 조명될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어떤 사건도 진행되는 전 기간 동안 시사거리가 되는 게 아니며, 단지 시작의, 매우 짧은 한 시점만 시사거리일 뿐이다.
수백만 관객이 열심히 지켜본 소말리아의 그 죽어가던 아이들이 이제는 죽지 않는가? 그들은 어찌되었는가? 살이 쪘는가 야위었는가? 소말리아가 아직도 존재하기는 하는가? 과연, 그런 나라가 언제 존재하기는 했던가? 그것은 다만 어떤 신기루의 이름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 pp.108-109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