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으라
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등산을 갔습니다. 처음으로 오르는 높은 산이지만 야영을 하며 정상까지 오르자고 다짐했습니다. 아들이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을 보며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언제쯤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지도와 나침반을 보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산 정상에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보다는 방향을 잘 보고 걷는 것이 중요하단다.”
산을 오를수록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서 어느 것이 길인지조차 잘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불안감으로 얼굴이 창백해진 아들은 아무 말도 없이 나침반만 보며 방향을 확인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 이러다간 평생 이곳을 못 벗어날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난 줄 아세요? 좀 더 빨리 걸어야겠어요.”
아들은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팔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산 정상에 오르려면 이쪽으로 가야 한단다. 우리는 여태껏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어.”
두 사람은 방향을 바꾸어 한참 걸은 후에야 목적지인 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산을 내려온 후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얘야, 시간보다 더 소중한 건 방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방향을 올바로 잡지 못하면 산속에서 헤매다가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단다.”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나침반을 아들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자신의 손목에 찼던 시계를 풀어 아버지에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 시계는 제가 스스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해 주십시오.”
이렇듯 인생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고정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방향을 제시하는 철학과 윤리와 도덕 그리고 성공 법칙들이 난무합니다. 날마다 성공과 행복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와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책을 읽은 사람 중에 과연 몇이나 행복하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결국 사람이 말하는 삶의 원칙과 성공의 비결은 한계가 있습니다. 개인이 경험하고 배운 지식이기에 누구에게나 100% 적용되지 않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원칙과 기준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참된 행복과 의미를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 pp.14-16
목적에 따른 예수님의 선택과 집중
이렇듯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선택하고 집중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제자들을 세워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기가 높아짐에 따르는 부와 명예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셨습니다. 그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의 비난과 험난한 여행길, 고향에서의 박대, 고단한 잠자리와 식사를 감수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집중하셨으며, 한 영혼을 위해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안락하고 편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과 목표에 집중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고난을 선택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부활하시던 그날 아침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 준 가르침을 상기시키셨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광의 잔치에 참여해 함께 기쁨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3).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마음과 생각을 모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같이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 pp.51-52
예수님의 믿음 ② : 고난을 피하지 않으심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수난을 알았으나 인내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위한 노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노예 취급을 받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 30냥에 노예처럼 팔려 가셨습니다.
둘째, 피조물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피조물에게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그분이 생명의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이방인처럼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아라비아 상인에게 팔린 것처럼 예수님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넷째, 육신의 찢김을 당하셨습니다. 침 뱉음과 채찍질 같은 모든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분이 맞은 채찍은 끝에 납덩이가 붙어 있어 맞으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육체의 찢김과 상함을 당하고 그분은 마지막으로 최후의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로마가 이방인을 처벌할 때 최악의 형벌이 십자가였는데 예수님은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나는) 지금 (피하거나 미루지 않고) 예루살렘(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으로 (믿음으로) 가고 있다”(마 20:18 참조).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그 길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안락과 안일을 좇다가 하나님의 뜻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걸어가시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그분의 나아감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 pp.109-110
듣는 마음을 구하라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려 3년 동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네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마.”
그는 항상 마음에 두었던 소원을 얼른 말했습니다.
“하나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당장 문 밖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며 붙들고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길거리를 나서니까 여자들이 전부 따라와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속삭였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쫓아다니며 “사랑합니다”를 외치는데, 그것이 너무 귀찮고 괴로워서 자기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튀어나왔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 모든 것을 물리쳐 주세요.”
이리하여 두 번째 소원까지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소원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 남은 소원을 가지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딱 한마디 소원을 말하려고 하니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라면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겠노라. 듣는 마음을 말이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레브 슈메츠’입니다. 직역하면 ‘듣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듣는 마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할 말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지혜라 여기고 그것을 터득했습니다. 마음이 둔하고 강퍅해지면 귀가 닫히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됩니다. 영적인 귀를 열어 놓고 듣는 것이 가장 큰 지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원하셨고,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소리에 모든 감각을 열어 두셨습니다. 우리 모두 경청의 삶을 살면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주위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도 민감해질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작은 손길을 나누고 기도하며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역사는 시작됩니다.
--- pp.223-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