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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사람 속

한 길 사람 속

[ 개정판 ] 박완서 산문집-08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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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76쪽 | 464g | 128*188*30mm
ISBN13 9788954650014
ISBN10 895465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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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짐을 풀 새도 없이 도로 가지고 홍콩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나니, 처음 가보는 외국 풍물에 대한 기대나 설렘보다는 다리 뻗고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이 나이에 할 짓이 아니다 싶었다. 자신의 딱 부러지지 못한 성질에 짜증도 났고, 동행한 두 사람의 기대와 활기에 넘친 모습에 비추어 나의 목적 없음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순전히 얹혀 가는 꼴이었다. ‘그래 기왕 얹혀 갈 바에는 동행에게 부담이나 안 되게 먼지처럼 얹혀 가자, 먼지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먼지처럼 자유롭게.’ 그렇게 생각하니 전혀 새로운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여행」중에서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친구나 후배에게 내가 가장 즐겨 하는 선물이 있다면 아마 그럴듯한 데서 밥이나 술을 사는 일일 것이다. 맛있는 것을 같이 먹는 일은 상대방이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좋고 형체를 남기지 않고 느낌만 남아서 좋다. 꽃이 가장 좋은 선물임은 그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의 단명함 때문이기도 하리라. ---「내가 꿈꾸는 선물」중에서

나는 요새 십 년이 여일하게 마당을 등지고 놓아두었던 소파를 마당을 바라보도록 바꾸어놓고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다. 스산한 바람에 으스스 떠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떨리고, 가을비에 뚝뚝 지는 잎을 보고 있으면 흙냄새가 아련한 그리움처럼 코끝에 와닿는다. 그리고 어디선가 읽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곰곰히 스민다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라는 소리에 싫지 않은 마음으로 공감한다. 삶의 길목마다 사는 맛이 마련돼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전망 좋은 집」중에서

나에게 언짢은 일이 있을 때 위로해주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기뻐해준 그들의 고마운 마음을 나는 어쩌면 무쪽처럼 떼어먹기만 하고 갚아준 적이 없었을까. 답장을 할 것처럼 아니, 전화라도 한 통 걸 것처럼 분류만 해놓고 이내 잊어버리고 만 내 마음이 정말 싫었다.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운 친지가 내 곁에 아무리 많아도 내 마음이 굳게 닫혔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내 집에 창을 냈으니 내년부터는 내 마음에도 창을 내야겠다. 어떤 나이도 행복해지기에 늦은 나이는 없으리라. ---「전망 좋은 집」중에서

고궁을 낀 돌담길에도 낙엽이 지천으로 쌓여 딱딱한 보도블록이 마치 흙길처럼 부드러웠다. 그런 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정도의 인사로 스쳐가고 말아도 되는 사이보다 조금 더 친하고 반가운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헤어져야 할 것 같아 머뭇거렸다. (…) 바쁘지 않으면 고궁에 들어가 잠시 바람을 쐬지 않겠느냐고 상대방이 먼저 말했다. 마침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차라도 한잔, 소리보다 어찌나 신선하게 들리는지 순간적으로 살맛이 다 나는 것 같았다. 덕수궁 안의 은행나무들이 자즈러지게 예쁜 빛으로 물든 잎을 아낌없이 떨구고 있었다.
---「고궁에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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