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8/9 조창완(chogaci@hitel.net)
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한 잎, 한 잎. 복사꽃 같기도 하고 매화 같기도 했다. 절로는 드물게 계단이 아닌 언덕이었다. 난 대웅전을 뒤로 하고 언덕의 아래를 향해 걷듯 뛰었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뛰어내려 왔을 때, 절집의 칸 막이 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묘하게도 그 절집의 이름은 冥府殿이 아니라 萬歲殿 이었다. 모두들 울지 않았다.
꿈을 꾸고 스스로 즐거웠다. 쏜살같은 시간들이 간다. 일주일 후면 결혼, 또다시 일주일 후면 중국이다.
하일지의 소설 읽기는 때로는 즐거움, 때로는 괴로움이다. 즐거움은 그의 소설이 그저 자신의 넋두리나 읊어서 미혹한 독자들을 우롱하는 우리 문단의 사소설적 경향과 많이 다르다는데 있다. 그 독특함, 그것이야 말로 하일지 소설을 읽는 매력이다. 아마 자신의 소설쓰기에서 가장 평이하고 쉬운 소설을 썼다고 자부할지 모르는 이번 소설 '새'역시 하일지 다운 독특함이 있다. 스스로도 그것을 가리켜 '소설 문학의 그 오랜 율법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어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작가 후기 중에서)
난 그의 꼼꼼한 독자는 아니지만 그의 책을 누구보다 탐독해왔다. 더욱이 내가 쓴 학부 졸업 논문인 '한국페미니즘 작품 연구'라는 되 먹지 못한 논문도 하일지가 쓴 '소설의 거리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라는 하일지의 논문을 토대로 썼다.(그 되먹지 못한 논문은 내 홈페이지 '문화탐험'이란 코너의 서두에 있다. 난 그가 작가, 작중의 화자, 독자라는 대상들을 각기 상정하고, 그 3자가의 심리적, 사회적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우리나라 여성작가 대부분을 일도양단하는 무모함을 보였었다. 고로 하일지는 나에게 중요한 작가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하일지 소설의 철저한 애독자는 아니다. 그의 경마장이란 제목의 네 소설 가운데 셋이상은 읽은 듯 한데, 군대가서 너무나 솔찍하게 정직하게 살아서 군대에서 쫓겨났다는 소설이 '경마장을 위하여'인지 '경마장 네거리에서'인지 구별할 수 없다.
비교적 즐겁게 읽었던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역시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소설들은 그렇다.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인 서사라고는 도대체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소설 '새'도 역시 그러하다.
증권회사에 다니던 A는 직장에서 퇴출되던 즈음 온갖 위기에 빠진다. 스스로도 가족내에서 한없이 고립되어 있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더욱이 퇴직금은 다른 사람에게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날릴 위기에 처해있다.
위기감을 느낌 그에게 어느날부터 한 마리 거대한 검은 새가 자신을 쫓기 시작한다. 어찌보면 알프레드 히치톡의 영화들을, 어찌보면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또 어찌 보면 카프카의 '변신'을 닮은 이 소설은 반복과 환상을 교차하는 교묘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새가 쫓아다닌다고 생각한 A는 치매증세가 있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돌보는 어머니, 그리고 부산에서의 인연으로 하룻밤을 지낸 후 가끔씩 관계를 갖는 젊은 부하직원 김지영을 교차하지만 자신을 쫓고 있는 새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구운몽에서 성진이 '양소유'가 되듯 그도 갑자기 도쿄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그를 오랜만에 돌아온 정객으로 대우하는 꿈속의 한 곳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일장춘몽의 배경이 될 법한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부를 가진 한 남자로 대우받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혼돈속에서 휘둘리다가, 스스로가 정착할 무렵에 그곳에서 쫓기듯 나온다. 다시 나온 세상 역시 그 꿈의 다름아리라고 느끼는 순간 그는 새가 된다. 그리고 그가 쫓겨다니던 새처럼 그 역시 이미 절망하는 한 중년의 사내를 따라다니면서 그는 다시 또 다른 새를 만들어가려(의지든 무의지든) 졸졸 따라다닌다.
소설은 앞에서 말했듯이 구운몽과 같이 환원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다만 구운몽이 불가적 인생무상을 말한다면 하일지의 '새'는 지금을 사는 중년 남성들(혹은 모든 현대인들)의 환원적인 비극성을 상징한다. 내가 잘 파악하지 못하지만 중년의 A가 겪는 그 비극적인 역사는 치매를 겪고 있는 아버지가 겪었던 삼척 정나진의 사태와 같다.(잘은 모르지만 아마 6-25레벌인 것 같다) 어렴풋이 읽기에 작가는 그 정나진의 대 홍수와 같은 비극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씁쓸한 위기감을 표현하는 것 같다.
하일지의 소설은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골머리 아프다. 우선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된다. 대상의 정체성은 복잡하기 그지 없다. 그의 아버지는 현실의 아버지와 이상세계의 아버지가 이상하게 일치하는 복잡성을 띨뿐더러, 그가 잠시 몸과 마음을 부탁하는 김지영과 그녀의 친구 정희도 정체성이 복잡하기 그지 없다. 등장인물 정충식이나 이연춘도 마찬가지다. 또 매일경제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에서 이 소설 연재에 관한 이야기가 직접 나오는 등 기존의 틀과 다른 파괴적인 형식들도 선보인다. 또 소설 속의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정치에 대한 비유는 현실 독자에게 팝아트가 주는 것과 같은 독특한 느낌을 준다.
물론 이 소설은 전반적인 구성이나 주제의식이 카프카의 '변신'과 가장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가 생경하듯 하일지도 생경하다. 좁은 소견의 한 독자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이상한 입장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소설은 황당무계하다. 하지만 하일지 소설은 나에게 너무나 쉽게 읽힌다고. 그것이 아직도 하일지가 소설을 쓸 수 있는 뭔가의 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