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을 시작하면 항상 그곳에는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상대방의 성격, 일하는 방식, 생각 등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신앙이 종교의 형태를 갖게 되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정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선 판단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사역할 때 서로 돕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일을 해 나가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질서를 지켜야 하는 사역 범위에서는 그 영역에 있어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도와주려고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 마음이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력을 미쳐 상대를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관계 가운데 오해나 추측을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선한 마음을 갖고 시작한 일일 경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진심이 왜곡되면 상처를 받기 쉽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맡은 작은 일에 충성하자!
공동체는 서로가 신뢰하기까지 사귐의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상대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기질이나 성품대로 하는 일을 도우려고 할 것이다. 또한 언젠가 진심이 통하고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주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다.
--- pp. 31-32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도 모임이 크게 부흥했을 때의 일이다. 한 기도 모임당 30명이 모였는데, 말씀 묵상과 기도 제목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기도하러 와서 이야기 한번 제대로 못하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모임을 보고 기뻐하실까?’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그룹 기도 모임은 몇 명이 적당할까 생각하다가 최소 2명에서 최대 7명이 적절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런데 기도 모임을 하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마음을 열어 어렵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이 의도하지 않게 교회 안에서 돌아다녔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일을 겪자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기도 모임에서 ‘네 편, 내 편’에 대한 생각을 나눈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믿어 주는 것이 ‘편’이라고 했다. 그렇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은 그 사람의 약점과 단점을 보완해 주고, 강점과 장점을 강화해 주는 것이다.
--- pp. 57-58
나는 기도 모임에 가서 깨달은 말씀을 계속 나누었다. 팀원들은 묵상을 나누면서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자아가 드러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본주의에서 시작된 자기중심적인 삶이었다.
예를 들어, “오늘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A라는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보람되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명령하시니 제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묵상했다고 하자. 이는 결과적으로 주님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부각되는 묵상이다. 결론은 자신을 나타낼 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바뀌어야 할까? 나는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이렇게 변화된 묵상을 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에서 제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니 저는 누군가 보고 있을 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은 것이지, 누가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는 더없이 냉정하고 경계를 세우는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다면 오직 주님 한 분뿐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부어집니다. 주님의 마음을 부어 주셔야만 선한 일을 행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마음과 힘을 주시는 주님이 기도의 자리에 계셔야 제가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그 힘과 마음을 주시기를 소망하고, 또 순종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묵상의 차이는 내가 드러나는가, 아니면 주님이 드러나시는가에 있다. 그런데 둘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 구분하기가 참 어렵다. 묵상하는 우리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동기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마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나 나를 나타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알아 가는 것이다.
--- pp. 102-103
깊어진 신앙 형태는 진정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는 일과 함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기대하고 주님의 은혜를 받는 또 다른 차원의 믿음으로 자라났다. 우리는 삐거덕거릴 수밖에 없는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묵상과 기도를 통해 올바른 길로 나아갔으며, 주님의 보좌 앞에서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가 부단히 애쓰고 힘써야 하는 일이 ‘믿음’이 자라나게 하는 것임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개인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은 실제적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열매를 맺었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임재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말씀에 등장하는 맹인, 듣지 못하는 자, 걷지 못하는 자, 나병 환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님의 임재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죄 사함과 병 고침 받는 역사를 맛보게 된 것이다. 진정한 기쁨이 북받쳐 올라오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고는 말이 통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도 모임으로 모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함께 나누었고, 삶에서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다. 함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 pp. 129-130
하나님이 공동체로 모이게 하신 교회 소그룹은 교회 지체들의 가장 작은 단위다. 순이나 구역, 목장 등 소그룹이 건강하다는 의미는 곧 교회 전체가 건강하다는 뜻이다. 교회 규모와 상관없이 가장 작은 단위인 소그룹이 건강하게 운영된다면 아무리 교회의 규모가 커지더라도 작은 교회에 서로 친밀하게 모인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몸 속 세포가 분열해 성장을 이루는 것처럼 역동적인 영적갱신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소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그룹 인도자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데 왜 훈련과 양육이 필요합니까?”라고 묻곤 한다. 기도는 영적 도구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기복적인 기도만 드리게 된다. 자신만을 위한 기도는 세상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동일하게 하는 기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pp. 173-174
자기 부인은 살면서 가장 힘든 도전일 수 있다. 지독한 자기 사랑을 갖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쉽게 놓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해서 무엇이든 주님이 원하시면 다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영적 교만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그만한 힘을 갖고 있다면, 사실 하나님을 굳이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이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필요에 대한 실제적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
믿음은 실제적이고 경험적이어야 한다. 이론만으로 푸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말씀대로 사는 삶은 영적인 실제이며,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기 부인이 선행될 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말씀 앞에서 다스려지는 것이다. 자신은 무력화되고 하나님의 뜻만이 실현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시인했다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차례다. 우리는 모두 주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마음을 쏟을 곳이 필요한데,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으면 그 친밀함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일, TV, 게임, 알코올, 관계, 마약, SNS 등 수도 없이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자신과만 살아가는 ‘나 중독’이다.
--- pp. 186-187
우리가 변하지 못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개개인의 기질과 정서의 차이다. 기질은 타고난다고 하지만, 예수 안에서 변화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을 수 있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창조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가 주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우리는 옛 사람으로 살았던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은혜 안에서 누리기만 하려고 한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지만 삶은 여전히 분열과 다툼으로 가득한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삶을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려면 오직 하나의 ‘길’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맏아들 되신 예수를 닮는 것이다. 그분의 성품, 인격, 언어, 깊은 지혜를 닮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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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p. 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