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의 경우, 평양이 중국?러시아?미국?한국?일본을 휘두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아울러 북한이 20년 전부터 이들을 조롱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공산독재정권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분명한 것은 평양이 수십 년 전부터 한반도의 운명을 자기 방식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3대에 걸친 김씨 일가는 국제 외교의 파란과 분화 속에서 늘 그들의 목적을 능수능란하게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야 옳다. 2006년 이후 유엔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
유엔의 무능은 사실 모든 당사국들 사이에 놓인 심각한 견해차의 반영일 뿐이다. 평양은 과거 중소관계를 활용했듯 미중관계의 이중성을 놀라울 정도로 잘 활용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아시아에서 중국의 군사적 부상과 마주한 북한의 핵위협은 남한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증대라는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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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사회주의 진영의 맏형 소련이 붕괴하면서 지원은 끝이 났고, 산업형 농업도 불행한 기후 조건에 압사하여 붕괴했다. 북한 역사상 최초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인구의 4분의 1가량인 5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유엔과 국제적십자기구에게는 현장 파견이 허용되었다. 당시 지상 최고의 밀폐된 나라, 자급자족의 원칙을 국가 이념으로까지 격상시킨 나라가 미증유의 인도적 비극에 장막 한쪽을 거두었다. 지원은 시급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평양 정권이 붕괴하여 북아시아 전체가 불안정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1994년 아버지 김일성을 승계한 지도자 김정일은 1948년 이래 중앙 통제되고 계획화된 경제체제를 뒤흔들게 될 역사적 도전에 직면했다. 기아로 야기될 반란 가능성을 무마하기 위해 정권은 이웃 중국과의 거래와 교환을 용인했고, 만성 부패를 묵인했으며, 상행위의 맹아를 열어주었다. 그것이 오늘날 북한 경제의 불가불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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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5차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 북한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핵보유국이 되었고, 미사일 개발은 관련 기술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개선을 거듭하고 있다. 바야흐로 북한은 핵폭발을 작동할 수단을 보유했다. 그러나 그 의도에 대해서는 서방, 심지어 한국, 일본 등에서 대부분의 분석가들이 한결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고, 이는 평양과 협상 및 대화를 할 수 없는 그들의 무능을 가리고 있다. 북한 핵무기는 무엇보다 공격용이 아닌 억제용이며, 그 목적은 자국에 대한 모든 개입(특히 미국의)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강대국들 자신이 옹호했던 핵 억제의 고전적 견해이기도 하다.
서구의 ‘창작 storytelling ’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핵개발이 동시에 정권과 그 지도자를 정당화하는 것-그 대가로 북한인들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당하고 있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권은 자신이 선제공격할 경우 남한에 주둔한 미군에 의해 정권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분명 평양은 도발하고 있지만 이는 공격이 목적이 아닌, 워싱턴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다. 이 정권이 자살을 원할 하등의 이유가 없고, 이는 더없이 합리적인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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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과 달리 탈북자들의 주된 동기는 자유의 추구도, 민주주의의 부재도 아니다. 대대적인 중국행 인구이동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의 2,200만 주민들은 최소 백만 명의 사망자를 야기한 살인적 기근을 겪고 있었다. 북한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는 북쪽인 중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향하는 남쪽 국경은 DMZ(비무장지대)로 인해 월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북중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둘러싸여 있다. 1,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은 서구에서 ‘폐쇄 국가’의 신화로 지레짐작하는 것과 달리 훨씬 덜 밀폐되어 있다. 국경 전역에서 강폭은 간혹 아주 짧고, 최고 영하 45도 이하까지 내려가는 겨울에는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탈북자들은 다들 오직 ‘식량과 의약품과 의복’을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고 했다. 이들은 옛 한국 영토였던 옌볜자 치주13에 거주하는 중국의 한인 소수민족 ‘형제들’에게서 줄을 찾았다. 그렇게 수천 명이 불법으로 중국에 정착했고, 위조여권을 구입했고, 중국과 북한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운반책이나 밀수업자들과 거래했다.
--- p.192~193
민간 부문의 탄생은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중 배급 공공체계가 붕괴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 배급품이 끊긴 북한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것을 팔아 식량을 사기 시작했다. 길가에서, 거리에서, 건물 밑에서 작은 노점들이 뿌리를 내렸고, 정권은 이를 용인했다. 주민들은 점차 밀수품-초기에는 중국, 오늘날에는 한국·일본에서 온-을 공급받았다. 온갖 종류의 수많은 상점들이 평양 대시장[통일거리시장]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체로 우리는 하나의 국영회사가 이 새로운 소비의 성전을 관리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전문 중개소를 통해 판매원을 고용하고, 상점 지배인은 행정당국에서 공식 사업허가증을 받는다. (……)
평양과 지방(특히 국경)의 부동산 현실에 정통한 한국의 한 정보에 의하면, “오늘날 건물의 80퍼센트는 민간회사에 의해 건축되고 있고, 그들은 이 아파트의 3분의 1가량을 사설시장에 되팔고 있다”. 사업가들은 이 구매를 공식적인 국가 매입으로 합법화하기 위해 현행법의 몇몇 결함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고, 이 과정에 행정부의 간접적 보장이 없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 p.232~233
오늘날, ‘시장 세대 market generation’의 구성원들은 이중의 공통점이 있다. 대기근을 겪은 이 무서운 젊은이들은 이념에 대한 무관심이 커졌다는 점을 공유하며, 확실한 가치인 돈을 통해 삶을 즐기려 한다. 만약 그들이 정권에 충성을 바친다면 이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민족주의에 의한 것이다. 15년 후쯤 그들의 자식들, 즉 최고의 안락함 속에서 자라고, 바깥 세계의 이미지를 접하고, 가족 내에서 이념의 세뇌교육을 받지 않은 그 아이들은 분명 ‘다른 것’을 갈구할 것이다. 더 많은 여행, 여가, 사업할 자유 등…. 어쩌면 그때가 정권의 다음 도전이 될 것이다. 즉 이 신세대의 갈망에 답하고, 그들의 꿈에 맞는 활력 넘치는 세계를 제공하는 것. 물론 권력을 잃지 않고.
--- p. 276~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