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디나가 치욕을 당한 것은 단순히 디나의 잘못 이전에 야곱 가문에도 원인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지금 야곱이 머물고 있는 곳은 세겜 성읍이다. 야곱은 이곳이 머물기 좋았는지 아예 은 백 크시타라는 비싼 값을 주고 그 지역 땅을 샀다. 땅을 산 것은 그곳에 머물려는 의도가 있어서다. 원래 야곱이 가야했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벧엘이었다. 왜? 야곱이 형을 피해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잠을 자다 꿈에서 하늘 사다리를 보고서는 하나님께 맹세했다. …그러면 야곱은 하나님의 집에 거해야 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집에 가지 않고 그냥 세겜에 머물렀다. …야곱은 거룩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에서와의 갈등이 해결되자마자 멈추었다. 벧엘까지 더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야 했는데 그만 여기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가족 구성원들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데 나태해지고, 그동안 붙잡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이를 반영하듯 34장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치열하게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이, 상황이 안정되니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슬금슬금 찾아온 세겜의 이방문화에 무방비로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난 후 하나님은 무엇이라 하시는가? 네가 하나님을 만나 약속했던 하나님의 집, 곧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벧엘로 올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가정이 든든하게 설 수 있는 비결이다. 벧엘로 올라가 야곱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뵙고 그의 영광을 구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야곱 백성이 평안하고 복받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26쪽 66. 견고한 가정을 세워야 한다 중에서
“유다가 딱 보니 순간 눈이 확 커진다. 할 말이 없다. 왜? 자기 것이니까. 결국 자기가 다말에게 가문을 이어갈 씨를 준 것이다. 유다가 이것을 보고 기가 막힌 고백을 한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6절). ‘그는 나보다 옳도다!’ 본문의 클라이맥스에 터져나온 고백이다. 여기서 ‘옳도다’(히. 차다크)는 ‘의롭다’(righteous)는 말과 같다. 내 며느리가 나보다 의롭다는 뜻이다. 그동안 유다는 자기가 의롭고 며느리는 불의한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느리가 보여준 증표로 유다의 범죄가 드러나자, 자신이 진짜 원인을 제공한 큰 죄인임이 드러났다.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나기 전까지 유다는 이중적인 기준을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진리가 밝히 드러나자 자신이 적용했던 이중적인 의의 기준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자신은 오히려 더 불의한 죄인이었음이 드러났다. 결국 유다는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탄식하며, 모든 사건의 원인제공이 자기에게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다말이 죄인이 아니라 자신이 죄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에 누구도 몰랐던 새로운 의가 등장한다. …유다가 붙들고 있던 옛 의, 옛 법도는 자기의 유익을 극대화하는 뒤틀린 의였다. 반면 다말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의는 자신을 믿음의 가문을 위해, 또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믿음으로 내어주는 의였던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날 새로운 의를 예표한다.”
117쪽 73. 다말, 새로운 의를 붙들다 중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성취감을 맛볼 때가 있다. 간절히 구하던 기도제목이 응답받고, 삶의 문제가 하나둘씩 해결될 때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사업이 풀리기 시작한다. 이럴 때 우리는 주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물의 차원에서만 멈춘다면 우리는 절반의 은혜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핵심에는 우리의 생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차원이 있다. 내 인생이 외부로부터 오는 복으로만 해석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신 꿈과 사명 앞에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로 내 인생이 해석될 때 상황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외부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진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이전에는 내가 복을 받으면 이 복이 내 것인 줄 알고 내 마음대로 사용하려 했다. 또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전보다 더 많은 성취, 더 많은 복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성공과 성취에 대해 착각한다. 내가 가진 뛰어난 능력이 부각되고 하나님은 그저 옆에서 힘을 좀 실어주신 정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전에는 내가 힘 있고 능력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그 이전에 주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존재임을 깨닫는다. 전에는 내 소유인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 삶의 모든 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는다. 이전에는 외부상황이 큰 문제였는데, 이제는 문제보다는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는 내가 더 큰 문제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 더 크고 놀라운 목적을 위해 쓰임받을 기초가 됨을 깨닫는다.”
192쪽 79. 해석이 바뀌어야 진짜 은혜다 중에서
“우리가 인생에 통제감을 잃어버리는 것은 인생이 사막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우리의 힘을 빼야 한다. 자존심과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힘을 빼야 한다. 지도를 보려고 하지 말고 이제는 나침반을 보아야 하고, 밤마다 뜨는 북극성을 보며 나아가야 한다. 이럴 때 이전에는 몰랐던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셨던 거대한 삶의 모자이크가 보이기 시작한다. 모자이크는 상관없어 보이는 저마다 독특한 색깔과 모양의 작은 조각들이 여러 개가 모여 전체의 큰 그림을 이룬다. 모자이크 조각 한두 개를 맞추어갈 때는 이것이 무슨 그림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자이크를 맞추어가다 보면 이 그림이 무엇인지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고, 마지막 모자이크를 완성하고 나면 이 그림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한다. 요셉의 인생이 계속해서 꼬여갈 때 요셉은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갈수록 힘들어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억울하게 이 감옥에 갇혔고 속히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요셉은 예기치 못했던 인생의 역전을 통해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시는 삶의 모자이크를 어렴풋이 보게 되었다. 그러다 2년 후,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다시 만나자 요셉은 조금 더 큰 모자이크 그림을 보게 되었다. 형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시험하여 형 유다의 심금을 울리는 진정성 있는 호소를 듣게 되면서 마침내 커다란 그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요셉이 어릴 때 꾸었던 꿈이 물론 전체 모자이크의 일부 조각이었지만, 이 조각들은 45장에 와서야 마침내 전체의 큰 그림이 드러나게 된다. 이 그림이 무엇인가를 깨닫자 요셉은 만감이 교차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았던 일과 아버지의 슬픔, 그리고 이유를 모르고 낯선 애굽 땅에서 지금까지 달려온 요셉의 걸음걸음,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완성시키려고 사용하셨던 퍼즐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감사하기도 하고 형들이 용서되기도 하고, 또 고생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265쪽 86. 인생 계획을 하나님께 맞추라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