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어머니는 봄날이 무르익은 날 태어나셨다. 배움이 없어 글도 모르고 교양도 없었지만 강인한 생활력으로 자식들과 손녀손자를 키우셨다. 철이 들면서 본 어머니는 늘 고무다라이와 함께 있었다. “고무 다라이(대야)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산다. 이 대야에 모래를 담으면 금방 잡부가 되고, 술과 과자를 담으면 장사꾼이 되고, 생선을 담으면 생선장사가, 다라이에 담아지는 대로 사고팔면 묵고 살 수 있다.” 노동판에서 돌아와 술 한잔 하시며 하시던 어머니의 말이 잊혀 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삶은 비극적인 상처의 연속이었다. “단디 살아라! 넘쳐도 문제고, 부족해도 문제다.” 어머니는 삶이 어떻다는 걸 일찍이 아셨기에 상처를 입더라도 피하지 않았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 속에 머문 상처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아셨다. 자신을 치장할만한 교양이 없으셔서인지 있는 그대로 눈물과 회한과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결국은 역동적인 삶으로 일구어내셨다. 그 정신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삶의 귀감이 되는 큰 선물이다.
‘어머니’라는 말은 딸도, 여자도, 아내도 대신할 수 없는 기표이다. 자녀의 생명에게 몸을 던지는 숭고한 생명의 주인이다. 구순을 넘기신 나의 어머니는 아직도 자녀들을 위해 기도를 하신다. 어머니의 기도는 구하고자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보여주신다. 일찍 부모를 잃어 따뜻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 없어 자식들에게 따뜻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머니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분이시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보여준 삶은 그 자체가 사랑이었다.
요즈음 생명을 책임지고 살아가려는 어머니가 얼마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즘이 확산되면서 ‘어머니’보다는 여성으로서의 자아성취감을 우선하고, 어머니의 상처를 반복하기 싫은 피해의식의 작동인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율도 떨어지고 있다.
자연의 위대한 생명의 질서 속에서 ‘어머니’는 항상 자신을 던지는 존재였고, 생명을 책임지는 사랑으로 위대한 문명을 만들 수 있었다. ‘어머니’가 고통을 회피하거나, 물질위주의 안락과 즐거움만 추구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삶을 요구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어머니는 신의 생명을 낳을 수도 있고 악마의 생명을 낳을 수 도 있다. 이제는 어머니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볼 때가 되었다.
봄의 생명력은 두꺼운 겨울의 옷을 찢고 피어난다. 봄날은 숨김없이 드러나는 진실한 생명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봄날을 기다린다. 어머니는 숨김없이 드러내는 봄날의 꽃처럼 고통과 상처를 사랑으로 꽃 피우신다. 그래서 생명이 그리울 땐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그러나 정작 내가 보고 싶은 건 내 속의 나다.
어머니는 나보다 먼저인 나이다. 어머니 속으로 들어가면 생명과 우주를 만난다. 우주가 머물러 있는 생명 터전에 대한 경외심의 또 다른 이름이 ‘어머니’이다. 나의 삶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살고 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에게 가서 생명의 고향을 느끼고 돌아온다.
후문
우리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도, 남도 사랑할 수 없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 된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 된 어머니도 될 수 없다. 어머니는 지식으로, 종교로, 도덕으로, 권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오직 생명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모두 어머님 덕분이다. 나는 어머니의 상실과 고통, 숨 가쁘게 살아오신 삶을 사랑하면서부터 나를 사랑할 수 있었고, 나의 자식들을 사랑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정신분석가로서 내담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어야 자식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의 남자들은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어야 아내와 자식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어머니에게 상실당해서 원망하는 아들은 여자를 욕정의 대상이나 보복의 대상으로 보기 쉽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이나 가부장적 삶을 요구하는 원인도 어머니의 사랑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여자에게 순종하길 요구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남자는 자식으로부터 어머니를 앗아가는 것이다. 부와 권력, 지배와 복종의 삶 속에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
나는 20여년간 정신분석상담을 하면서 어머니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위대한 생명의 질서를 가지고 사는 존재인지 고백하고 싶었기에 올 봄에 [태교 49개월]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고, 태교상담가 양성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매달 임산부들에게 태교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임신부들에게 아이를 낳기 전에 반드시 부모님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태교의 가치는 높다고 강조한다. 부모님이 자식들을 어떻게 대했건 자식을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이 생명질서이다. 부모는 자식한테 못해준 회한과 아픔은 더 깊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에는 미래가 없다. 자본주의가 만든 상품에 불과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글을 마치면서 오늘도 자식들을 위해 삶을 기도로 보시고 살아가시는 어머니는 나의 삶에 영웅이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당신의 삶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다.
2018, 9, 29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