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K라는 한 남자와 이별을 했던 과정이다.
나의 아빠도 피아노 선생님과 젊은 날 이별을 했고, 또 나이가 들어 그녀를 영영 더 먼 곳으로 보냈다. 나의 엄마는 내가 알 도리 없지만 어떤 식인가의 이별을 겪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속으로 묵혀야 하는 쓸쓸함이 있고, 밖으로 까발려야 하는 우울이 있는 법이다. 무얼 묵히고 무얼 까발릴 것인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_ 「이별의 과정」 ---pp.33-34
“어디로 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가 주먹을 쥐고 가슴을 퉁퉁 쳤다.
“그런 말이 아니고! 지금 어디로 가느냐고요. 베네치아로 가는 건지, 파리로 가는 건지, 런던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한국으로 가는 건지 말이에요!”
나도 가슴을 칠 노릇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일부러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닌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마음대로 하세요. 나도 몰라.”
“들어가세요.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그제야 내려다보니 그는 슬리퍼 바람이다. 저걸 신고 뛰어왔구나. 나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냈다. 자판기에서 콜라 한 캔을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겉절이와 부추김치와 삼겹살과 또 홍어에 대한 보답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차가운 캔을 만지작거리던 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내미니 콜라를 덥석 바지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다.
“잘 가고요, 기차 거꾸로 타지 마세요.”
나는 끄덕인다. 추리닝 바지가 콜라캔 때문에 축 처졌다. 그가 돌아서고 나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워질 것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그의 손을 조금 더 오래 잡고 있었다. _「어디로 갈까요」 ---pp.67-68
세상에는 사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숱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신원이는 수많은 그들 중의 하나일 테다. 우리는 신원이의 이후를 증언해줄 그 어떤 단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전히 지영은 신원이가 무엇을 원했는지 궁금했고, 나는 신원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궁금했다.
그러므로 신원이를 뺀 우리의 이야기는 기사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만으로는 어떠한 기사도 쓸 수 없었다. 냄새도 없이, 소리도 없이 아무렇게나 사라져버린 신원이가 남겨둔 나머지 세상에서 지영과 나는 여전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영영 오프더레코드로 남을 이야기들. 신원이의 모든 이후가 오프더레코코드가 되었듯 말이다.
“언니.”
신발을 신다가 지영을 바라보았다.
“……자고 갈래요?”
그녀는 조금 민망한 듯 눈길을 돌렸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지영을 쳐다만 보았다. 미처 제대로 신지 못한 신발 때문에 휘청대다 한 손으로 신발장을 짚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목을 간질였다. 못 들은 척하는 편이 나았을까. 신발을 마저 신고 가방을 고쳐 멨다. 뒤에서 지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물소리 같았다.
“자고 갈래요?”_「오프더레코드」 ---pp.227-228
도로시와 헤어지는 길이면 나는 동네를 혼자 산책하곤 했다. 테헤란로 뒷길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막다른 골목인 듯 싶어 들여다보면 음악 한 점 흘러나오지 않는 술집이 있었고 또 하나 골목을 돌면 엇비슷하게 생겨 처음 것과 구분이 어려운 또 다른 술집이 나타나곤 했다. 하나같이 닮은꼴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창 안에서 나를 손짓해 불러주었으면, 했지만 그곳의 술집들은 모두 창문이 없었다. 역삼동 뒷골목을 돌며 나는 내가 가져보지 못한 것,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열일곱 평 오피스텔의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때면 침대에서 누가 팔 벌리고 기다리기도 하는 것처럼 풀썩 몸을 날렸다. 아무도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하루치의 먼지만 날릴 뿐, 빈 침대였다. _「산책」 ---p.242
생애의 어느 과정을 건너뛴 사람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어떻게 치료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 나는 내가 한 번쯤 온전한 생애의 과정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한 적이 있었다. _「산책」 ---p.256
미로 같은 테헤란로 뒷골목을 하나씩 돌아나갈 때마다 점점 어두워졌다. 맞은편에서 재킷을 손에 말아쥐고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사박사박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 고개를 숙인 채였지만 취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안기고 싶었다. 나를 한 번만 안아줄래요? 그렇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나를 안아준다면, 아무 설명 없이 잠시만 저 어깨뼈에 이마를 갖다댈 수 있다면 이 피로가 조금은 가실 듯했다. _「산책」 ---p.256
소설을 쓸 때면 내 등 뒤에서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괜찮아, 괜찮아, 등을 토닥이기도 하고 괜찮니, 괜?니, 말을 걸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새침하게 앉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쯤, 나는 당신을 안아보고 싶다. 당신이 나처럼 이별에 서툰 사람이라면 더 안아보고 싶다. 아니라면, 잘 헤어지는 방법을 모르는 애인을 둔 당신이라도 좋겠다. 이번에는 새침하게 등 돌리고 선 당신을 내가 뒤에서 가만가만. 다정하게.
---'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