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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그 먼 길

이주, 그 먼 길

: 우리 사회 아시아인의 이주 노동 귀환을 적다

우리시대의 논리-1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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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02쪽 | 423g | 153*224*30mm
ISBN13 9788964371534
ISBN10 896437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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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세기
1963년 덕적군도 문갑도에서 태어나 인천 뭍으로 건너왔다. 1985년부터 세창물산 신흥목재(우아미가구) 청호가구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당했고, 그 후 동일제강과 협신사, 그리고 목공소 등을 전전하며 현장 노동자로 살았다.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먹염바다]와 [언 손]을 냈다. 이 책에는 시인이며 인권 운동가로 살아온 내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2005년부터 ‘한국이주인권센터’와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이주노동자, 이주민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크고 작은 고통들을 직면하며 받아 적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소박한 꿈을 위한 ‘오디세이아’의 모험을 함께하는 친구들이므로, 이 기록들은 나와 같거나 다른 이들에 대한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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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이주노동자에게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인천 남동 공단에서 모임이 있는데 함께할지를 묻는다. 좋다고 답한 뒤 찾아가는 공단 길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회합 장소인 공장 기숙사에 들어서자 카오스처럼 벗어 놓은 얽히고설킨 신발이 자못 절경이다. 저것이 바로 삶이라면 그야말로 극적이다. 라호르에서, 카라치에서, 이슬라마바드에서 신발이 끌고 왔을 이주의 길이 불현듯 궁금했다.---「굿다하 피스!」중에서

실상 이주노동은 환상과 같은 것이라서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삶이 연장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앞날이 막막할 정도의 절망이 찾아온다. ‘완전한 귀환’은 “많이 벌고, 많이 아껴서 모국의 가족들에게 더 밝은 미래를 제공한다.”라는 이주노동자의 목적이 달성된 경우다. 하지만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귀환한 이후 가족과 결합하고 지역사회와 통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시내 중심에는 트라이시클의 행렬이 끝이 없다. 매캐한 매연을 내뿜으며 사람들의 발이 되는 트라이시클 운전이, 이곳에서 직업을 창출하는 유일한 일처럼 보인다.---「뫼비우스의 끈」중에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는 성장 배경과 환경을 봤을 때 그나마 선택받은 이들이다. 하지만 노동에는 선택이 없다. 한 집안의 가장, 남편, 아버지로서 이주노동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사출직 노동자, 가구 배달 기사, 일용직 건설 노동자, 야간 일을 전담하는 노동자로 가는 것이다. 그가 그 나라에서 어떤 신분이었는지, 성장 배경이 어떻고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지시에 따르고 복종하는 건강한 노동력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뫼비우스의 끈', '어디로 가야 하는가」중에서

고향으로 귀환해 조그만 의류 공장을 차리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자고 일어나 몇 발자국만 가면 공장 작업장이고 일이 끝나 또 몇 발자국 떼면 방이었지만, 그는 꿈이 있어 행복했다. 일주일씩 주야 맞교대로 하루에 열두 시간 일해야 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몸은 쇳가루 때문에 늘 알레르기에 시달리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생산량 독촉을 받으면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일했다. 여기에서 밀리면 갈 곳이 없었다. 어렵게 온 이주노동이기에 뼈가 녹아내리는 한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어디로 가야 하는가」중에서

몸이 아파도 병원은 엄두도 못 낸다. 친구를 만나고 싶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다. 비싼 택시비를 내고 가야 한다. 한국인에게 폭행을 당해도 경찰서에 갈 수가 없다. 모국어로 쓰인 책 한 권도, 신문 한 장도 구경하지 못한다. 번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생활하는 방은 단출하다. 간단한 취사도구와 카펫만이 세간의 전부다. 방 안의 풍경은 그가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어디로 가야 하는가」중에서

“온종일 방 안에서 놀아요. 밤이면 가끔 산책을 나가요.”
네 살 된 돈나린의 하루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돈 씨 부부는 한국 생활 9년째를 맞고 있다. 부인인 린 씨가 산업 연수생으로 먼저 한국에 왔다. 그리고 얼마 뒤 남편이 고용허가제로 들어왔다. 그 사이 한국에서 둘째 돈나린을 낳았다. 돈나린은 국적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무국적자가 되었다. 필리핀 친정에서 자라고 있는 첫째는 열 살이 되었다. 낳은 지 1년도 안 된 젖먹이를 떼어 놓고 한국에 온 이래 여태껏 헤어져 살고 있다. 때마침 딸과 인터넷으로 메신저를 하고 있기에, “딸 보고 싶지 않아요?” 하고 물으니, 그녀의 눈에 잠시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메신저를 통해 필리핀에 있는 큰딸을 보는 것이 일과라고 한다. ---「파트타임 인생」중에서

다문화 가정을 꾸려 가기가 너무 힘이 들어요. 우리를 그냥 사람으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오성혜 씨는 일본에서 배운 일본어와 방글라데시 출신인 남편의 기술로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주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의욕이 넘쳤다. 자신들의 다문화적 특성이 한국 생활에 빠르게 정착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을 찾아온 것은 냉대와 편견이었다. 다문화 가정 1세대라고 할 만한 이 부부에게 생활은 곧 싸움이었다. 일자리를 찾는 어려움부터 시작해, 주변의 따가운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에리카의 꿈」중에서

그의 등 너머로 먼 길을 온 사내가 보인다. 터번과 히잡을 벗고 콧수염까지 깎고는 말끔한 신사복으로 차려입은 사내는, 사방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광막한 산맥 아래 토담집들만 몇 채 있는 마을을 떠난다. 가방 하나 들고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난다. 웃음 띤 얼굴은 이내 잔뜩 긴장해 굳어지고 그가 떠나온 자리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떠나온 자리로 되돌아가 생활에 묻힐 것이다.---「진돗개와 야반도주」중에서

이주는 끝이 없는 다람쥐 쳇바퀴 같다. 돌아온 곳의 현실이 또 다른 탈출을 꿈꾸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유일한 생존이자, 삶의 탈출구가 아닌가. 이주의 삶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한 이주의 삶을 통해 무엇이 변화하는가. 그들의 눈빛이 두려움의 눈빛인지, 아니면 새로운 꿈을 향한 눈빛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천천히 공항 출구를 빠져나왔다.
---「이주, 그 먼 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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