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나는 베를린 기념조형물들의 공통된 특성에 주목했다. 그 기념조형물은 대부분 역사적인 기억을 품은 장소에 밀착된 느낌을 준다. 광장의 지하에 숨은 듯이 설치되어 있거나, 광고판, 버스 정류장, 기차 승강장, 보도블록 등 도시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처럼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또 공원처럼 조성되어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고 체험하고 머무를 수도 있으며, 베를린장벽처럼 동서 분단의 유산이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된 곳도 있다. 이처럼 일상적인 풍경과 단절되지 않도록 제작, 설치된 방식을 나는 ‘도시의 피부에 스며드는 형식’이라고 오래전부터 정의해왔다. 이런 형식이야말로 기념조형물이라는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적절하다. (중략) 역사적인 기억을 매개하는 예술 작품으로서 하나의 기념조형물을 경험한다는 것은 미적인 체험과 더불어 역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역사 속의 인간들이 겪었던 아픔과 기쁨까지 모두 공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념조형물은 역사의 교훈뿐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든다. 결국 기념조형물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시간이 정지된 듯한 텅 빈 공간이 사람을 압도한다. 그 텅 빈 느낌은 중앙에 놓인 피에타--- p.Pieta) 형태의 조각상 때문에 더 강조되는 듯하다. 크지는 않지만 육중한 느낌의 청동상에서 배어 나오는 강렬한 기운 때문인지 여백의 빈 공간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 천장의 둥근 창을 관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청동상의 형태와 벽의 질감을 살려낸다. 사람들은 대부분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침묵 속에서 공간을 응시하게 된다. 은연중에 추모의 묵상과 기도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 p.18
사각형 투명 유리창 아래로 보이는 밀폐된 공간의 모든 벽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하얀 책장들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규칙적인 칸막이로 나눠진 열네 개 층의 책장들은 모두 비어 있다. 기하학적인 공허가 지배하는 이 공간은 2만여 권의 책들이 불타서 사라졌음을 암시한다. 마치 책들의 시신조차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묘지 내부를 보는 것 같다. [...] 책들이 소실되고 저자들이 추방된 곳에서 침묵과 정적만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유일하게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지점은 지상으로 나 있는 투명한 유리창이다. 투명 유리창은 하늘의 변화와 주변의 건물을 반사한다. 그 위에서 사람들이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서 지하 도서관을 굽어보고, 그들의 그림자가 도서관의 하얀 책장에 어른거릴 때 이 기념조형물은 완성된다. --- pp.43-44
그의 응모작은 기념조형물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명료한 상징이나 물질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수직적이고 장엄한 형태로 지상에 돌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피부에 난 상처 또는 치유되지 않은 흉터처럼 땅속에 자리 잡은 채 오욕의 역사에 대해 고요한 경고를 보낸다. 자태를 뽐내지 않고 도시의 피부에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공공미술의 방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p.47-48
소란하고 현란한 도시일수록 명상적인 공백과 여백이 사람들에게 감성적인 울림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특히 한국의 대도시에 적용해볼 만하다. [...] 답답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숨통을, 관조의 틈새를 틔워주려면 공공성이 강한 장소들을 최대한 단순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공공장소에선 자꾸 무언가 채우고 치장하고 덧붙이는 것보다 많이 비워내고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을 공공미술의 형태로 추진해도 의미 있을 것이다. --- pp.49-50
모든 특별열차에 대한 기록을 하나하나 소상히 밝히고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그 기록들은 이 장소에서 벌어진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게 한다. 실제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추상적인 공감이나 관념적인 이해 그리고 형식적인 애도를 거부한다. 그것은 기괴한 나치 시절의 일상을 지배하던 제도화된 박해, 추방, 살인을 정확한 숫자와 단어 들로 요약해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특별열차에 강제로 실려 간 유대인들의 모습,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간 그들의 마지막 여행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려보도록 유도한다. 승강장에 깔린 186개의 철판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딛을 때마다 186개 각각의 추모비를 만나는 셈이 된다. 오래된 선로의 기억은 그렇게 되살아난다. --- p.88
추모석을 제작한 이유는 나치가 추방하거나 살해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추모의 대상에는 유대인 외에도 정치범,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여호와의증인처럼 나치에 희생된 모든 이들이 포함된다. 그는 이런 추모석 제작을 일명 ‘슈톨퍼슈타이네 프로젝트’로 부르며 계속해오고 있다. ‘슈톨퍼슈타인--- p.Stolperstein)’은 stolpern--- p.걸려 넘어지다)와 Stein--- p.돌)이라는 독일어 단어들이 합쳐진 것으로 ‘걸림돌, 장애물, 난관’ 같은 의미를 지닌다. [...] 길바닥의 추모석들은 나치에 희생된 이들이 망각되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걸림돌이나 장애물로서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추모석들을 밟고 다닐수록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이 더욱 활발히 되살아날 수 있다고 작가 군터 뎀니히는 생각한다. --- p.103
로니 골츠는 잊힌 역사적 장소에 대한 기억을 버스 정류장이라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 되살려놓았다. 그 때문에 역사적 장소에 전혀 관심이 없는 시민들에게도 쉽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특히 버스 정류장 뒷면 중앙에 적힌 글귀가 사람들을 생각으로 이끈다. 긴 울림을 지닌 짧은 문구는 “왜 이 정류장이 경고의 장소인가?”라는 질문 그리고 18세기 유대인 신학자의 말을 빌린 “구원의 비밀은 기억 속에 있다.”는 답변이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은 기억의 매개체가 되고,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과거에 대한 정보와 함께 있다가 떠나간다. --- pp.158-159
도시의 환경에서 기념조형물은 어떤 존재인가? 흐르는 시간과 변화하는 삶 속에서 기념조형물은 도시의 역사를 어떤 형태로 담아내야 하는가? 프랑크 틸의 「빛상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작가가 도시 풍경을 대표하고 대중의 시선을 끄는 광고판의 형식을 차용했던 데에는 이런 고민들을 담아내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역사를 상기시키는 기념조형물이 현대적인 광고기술의 형태를 취하며 진화하는 방식이다. --- p.175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앞에서 소개한 아홉 곳의 기념조형물들과 다른 그만의 특징을 품고 있다. 바로 불행한 과거를 반성, 경고, 추모, 상기시키는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 ‘축제’의 성격이다. 세계의 예술인들이 모여 자유로운 벽화 축제를 벌이면서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장벽은 화합과 통일의 기념조형물로 승화되었다. 죽음의 경계선은 예술의 벽이 되어 자유로운 지구인들의 순례가 이어지는 하나의 성지로 변모했다. --- p.227
여러 논의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로운 공모 절차가 도입되었고, 국제적으로 저명한 스물다섯 명의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이 초대되었다. 여기서 피터 아이젠먼과 리처드 세라가 합작한 설계안이 1998년에 최종 후보로 선택되었다. [...] 난관 속에서도 피터 아이젠먼은 추모비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다. 몇 번의 설계 수정을 거치면서 지하에 930제곱미터 넓이의 정보관이 추가되었다. 지상의 기념조형물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전혀 기록되지 않아 추상적인 콘크리트 구조물로만 보인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지하의 정보관을 통해 그런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연구를 거쳐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진, 편지, 영상 자료 등으로 구성된 정보관의 전시회가 따로 준비되었다. --- pp.68-69
1999년엔 수년간의 토의를 거친 연방의회가 추모비 설치를 결정했고, 동시에 프로젝트를 전담할 연방 직영 재단도 설립되었다. 그렇게 2000년 초가 되어서야 현재의 부지에서 착공식 축하 행사가 개최되었다. 처음 공모를 내건 지 6년 만에 첫 삽을 뜬 것이다. 2000년 11월에는 연방의회가 정보관을 포함한 추모비 건립을 위해 2500만 3000유로, 전시회 구축과 정보관의 초기 장비 구입을 위해 230만 유로의 예산 사용을 승낙했다. 소요 예산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자 공사 진행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1년 5월 첫 번째 콘크리트 블록 형태의 추모비를 시범적으로 설치한 후, 추가로 콘크리트 전문가들이 제작에 참여할 정도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이를 통해 콘크리트 재질의 추모비 2711개 하나하나에 특수 표면 처리를 하여 비바람과 낙서에도 보호되도록 만들었다. --- pp.69-70
70미터 길이의 옛 장벽시설의 양쪽을 그와 유사한 단순한 형태의 강철 벽으로 가로막은 거대한 「기념비」 [...] 역사적인 현장의 잔존물을 최대한 살리면서 기념조형물로 변화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자면 「기념비」 역시 단독적인 형태가 아니라 기존의 환경과 최대한 밀착하여 연속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커다란 규모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인 느낌을 풍기지 않는다. [...] 이러한 기념조형물을 공모하기 전에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무엇인지 수년간 논쟁적인 토론 과정을 거쳤다. 기념조형물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 p.189
2000년부터 카니 알라비의 감독하에 부분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330미터 길이의 벽화를 복원했다. 50만 마르크의 예산이 투입된 이 작업으로 33점의 그림이 다시 깨끗한 상태를 회복했다. [...] 2009년 벽화를 복원하기 위해 기존의 벽화 작업에 참여했던 예술가 87명이 다시 초청되어 그림 100점을 제작했다. 2015년에는 손상된 그림들을 보수하고 청소하는 데 23만 유로가 투입되었다. [...] 분단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장벽은 벽화로 장식된 거대한 기념조형물이 되었지만 그 미래는 여전히 미지수다. 다만 이 기념조형물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pp.2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