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삼계에 대해 알게 되면 ‘저곳은 갈 만한 곳이다.’, ‘저곳은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돌고 도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게 되어, ‘인간 몸 받았을 때 열심히 수행해 악처에 가는 일을 없게 하고 빨리 윤회에서 벗어나야겠다.’라는 경각심이 일어납니다. _ 15쪽
경전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삼계가 다 불타는 집과 같다’는 뜻입니다. 욕계·색계·무색계가 즐거움이나 고통이 많고 적은 차이는 있지만, 이 셋 모두 중생, 즉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우리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삼계를 끊임없이 떠돌게 됩니다. 때로는 좋은 곳에 태어나 즐거움을 누리고, 때로는 나쁜 곳에 태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계속 반복됩니다. 경전에 보면 중생이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과 피가 지구상에 있는 바닷물보다도 많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입니다. _ 18쪽
욕계에는 인간계보다 즐거움이 훨씬 많은 천상계가 있습니다. 『법구경』 주석서를 비롯한 여러 경전에는 계율을 지키고 보시를 행해서 욕계 천상계에 태어난 예가 많이 나옵니다. 욕계 천상계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제일 낮은 천상계가 사천왕천이고, 그 다음이 삼십삼천三十三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입니다. _ 35쪽
부처님의 상수제자 중 한 명인 목갈라나[目?連] 존자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고 불립니다. 목갈라나 존자는 가끔씩 삼십삼천에 올라가서 천인들을 만나 어떤 공덕을 지어 천상계에 왔는지 물어보고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수행자들에게 가르쳐 주곤 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가 한 천인에게 무슨 공덕으로 천상계에 왔느냐고 물으니 그 천인은 처음에는 말을 안 하다가 결국 “저는 무 한 조각을 스님께 보시해서 이곳에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께 그런 사소한 공덕으로도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냐고 여쭈어 보니 부처님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듣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아주 사소한 보시도 바른 신심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행하면 그로 인해 욕계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_ 41쪽
삼계 혹은 서른한 가지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조건은 바로 갈애渴愛[ta?ha]와 업業[kamma]입니다. 업을 이해하면 윤회가 일어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꿰뚫는 경」에 보면 “나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고 나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업은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_ 53쪽
업은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동일한 업을 지었더라도 꼭 같은 결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이 이제까지 살면서 악업을 좀 지었다고 생각한다면 남은 삶의 기간 동안 열심히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강물처럼 큰 선업을 지으면 소금의 짠맛과 같은 악업을 희석시켜 그 악업의 결과가 약해질 것입니다. _ 65쪽
욕계 선업의 기본은 보시를 하는 것과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고 계율을 지키는 삶을 살면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보시를 해서 욕계 천상계에 태어난 예는 무척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탕수수 한 줄기, 무 한 조각을 보시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한 것으로 천상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보시를 하거나 한 가지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선업의 재산이 늘어 천상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을 수 있습니다. _ 71쪽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깥 대상에 대한 인식과정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인식과정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혹은 기절했을 때처럼 생각 없이 멍한 때가 있고, 이와는 반대로 눈·귀·코·혀·몸·마음의 문을 통해 형상·소리·냄새·맛·감촉·현상 들을 아는 일련의 마음이 연속해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마음을 ‘죽음의 마음[cuti-citta]’이라고 하며, 죽음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죽음 직전 인식과정’이라고 하고, 죽음의 마음이 일어난 직후 내생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마음은 이생의 마지막 마음이고, 재생연결식은 다음 생의 첫 번째 마음입니다. _ 95쪽
죽음 직전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평소에 선업을 많이 쌓아 두는 것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누각 경」에 보면 “몸의 업이 썩고 말의 업이 썩고 마음의 업이 썩으면 복되게 죽지 못하고 복된 임종을 맞이하지 못한다. 하지만 몸의 업이 바르고 말의 업이 바르고 마음의 업이 바르면 복되게 죽고 복된 임종을 맞이한다.”라고 나옵니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입니다. _ 95쪽
윤회의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윤회가 왜 일어나고,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먼저 통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러한 윤회의 원리와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가르침이 십이연기입니다. 십이연기를 모르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해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불교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_ 139쪽
조건 따라 일어난다는 말을 이해하면 무상無常함도 이해하게 됩니다.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은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하기 마련인 것이므로 영원할 수 없어서 무상합니다. 또한 무상하다는 것은 불완전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괴로움[苦]의 특성이 있습니다. 무상하고 괴로움인 것은 ‘일어난 법이여 사라지지 말라.’고 한다거나 ‘괴로움이여 일어나지 말라.’라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없으므로 현상들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자아[我]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고 괴로움인 것은 무아無我입니다. 이처럼 연기를 이해하면 무상함뿐만 아니라 괴로움과 무아에 대한 이해도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연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곧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_ 143쪽
우리는 무명으로 인해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를 합니다. 그때의 의도가 의도적 행위입니다. 무명과 의도적 행위, 이 두 가지를 과거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무명과 의도적 행위를 조건으로 현재 생이 일어나는데 이생에서 최초로 일어나는 마음을 재생연결식[의식]이라고 합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난 순간부터 또 계속 정신과 물질이 이어지면서 여섯 감각 장소가 갖추어집니다. 여섯 감각 장소를 조건으로 바깥 대상과의 접촉이 일어나고, 그때 느낌이 일어나면 그 대상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가 강해지면 취착이 되는데, 그 취착으로 인해 또 존재, 즉 업 존재가 생깁니다. 이렇게 의식에서부터 존재까지가 현재에 해당합니다. 그중에서도 의식부터 느낌까지는 과거의 원인에 의한 현재의 결과이고, 갈애부터 존재까지는 현재의 원인입니다. _ 171쪽
많은 사람들은 윤회를 생각할 때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묻습니다. 무아인데 어떻게 밥도 먹고 말도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냐고도 합니다. 이것은 무아를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일부 학자들조차도 윤회와 무아를 모순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윤회와 무아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문과 책을 내기도 합니다. _ 175쪽
부처님은 태어날 조건이 있으면 태어나고, 태어날 조건이 없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무조건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무조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있을 때 다시 태어나고 조건이 소멸하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_ 179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