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 모양이 칸칸이 자잘한 것은 그 옛날 북촌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단위로 마을을 만들었기 때문이고, 가회동이나 계동에 비해 모양이 얇고 길쭉한 것은 옆에 범접할 수 없는 창덕궁이 자리 잡은 까닭이다. 그 기다란 모양을 한 동을 나는 종로구의 칠레라 불렀다. 원서동. 창덕궁 후원 서쪽에 위치한 동네. 길을 걷다 만나는 벽돌집에 기와를 얹은 카페는 조선 최초의 복싱장이며, 별생각 없이 걷다가 마주치는 비석은 역사책 속 인물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곳. 그리고 웃음기 하나 없이, 마을버스의 정류장 안내 방송에 빨래터가 등장하는 동네. 청와대가 멀지 않은 까닭에 일정 고도를 넘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이미 자리 잡은 한옥은 허물 수 없는 동네. 동네에서 유일하게 진행되는 공사라고는 무려 조선시대의 자취를 되찾고자 종묘와 창덕궁을 잇는 공사뿐인 곳. ---「어떤 동네」중에서
하나같이 작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해 있으나 친절한 호스트들이 힘든 내색하지 않고 선뜻 캐리어를 날라주었던, 새로운 도시의 새로운 집들. 낯선 곳이란 점을 빼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별것 없었다. 장을 보고, 저녁을 차려 먹고, 커피와 맥주를 마시고, 늦잠을 자는 일상이었다. 빨래를 해서 널고, 책을 뒤적이며 빵을 물어뜯는 아침은 서울에서 보낸 주말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사랑스러웠다. 무엇보다 흔한 일상 속에 비일상의 내가 놓여 있었다. ---「자기만의 방」중에서
하루 대부분을 출근에서 퇴근까지로 소모하고, 그 외에는 잘게 토막 나 있던 서울의 시간. 조용히 책을 읽고, 홀로 생각할 시간은 짬을 내어 발굴해야 하는, 집중까지 가닿기엔 적잖은 예열이 필요했던 서울의 여가. 그러나 여행 중에는 자유롭다. 나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들을 자잘하게 늘어놓고 마음껏 노닐 수 있다. 가사가 선명하지 않은 음악을 틀어두고, 맥주나 커피를 옆에 둔 채, 노트북을 펴고 앉아 활자를 고르는 시간. 볕 좋은 자리에 앉아 털을 헤집는 고양이처럼 나는 그 시간 안에서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자기만의 방」중에서
늘 단념과 비관을 내뿜던 내가 이곳을 마련한 것을 알고, 몇몇은 이제 그간 말해온 계획을 접은 것이냐고 물었다. 이를테면 이민이나 퇴직 같은 것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새로운 갈피를 찾아 헤맨 것임에도, 새로운 결정 앞에 더 열심히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떤 매듭의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은 나의 등대와도 같아서, 나는 여기 이 불빛을 바라보며 안도하고, 그 위안으로 더 멀리 떠돌 수 있겠다고 생각하므로. ---「이곳은 등대와도 같아서」중에서
침실 창가에는 작은 책상이 있다. 그 위에 놓인 건 무지 노트와 볼펜 한 자루. 다녀간 이들은 거기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남겨두고 간다. 다정하고 상냥한 인사. ‘잘 쉬다 가요’ ‘다음에 또 올게요’ 같은 말들. 페이지들을 넘기다 막연히 생각해오던 것이 떠올랐다. 방명록이 아닌 그냥 노트에, 아무나 자유롭게 자신의 문장을 한두 줄 남기는 거다. 여행에 관한 것도, 날씨에 관한 것도, 자신에 관한 것도 다 좋다. 그냥 앉아서 노트를 폈을 때 생각나는 ‘생각’을 옮기는 노트. 그걸 모아서 책을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 묵직한 어깨와 등을 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공상」중에서
나는 ‘인연’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그 두텁고 질긴 개념을 설명하기에 내가 엮는 단어들은 투박하고 조악했다. 다행히 페트라는 너그러이 이해해주었다. ‘서울이든 부다페스트든 아니면 다른 어느 곳이든,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 만국의 인사는 모두 비슷한 맺음말로 끝난다. 당신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말. 다른 언어에 담긴 비슷한 마음. 진부함 속에 숨은 진리. ---「인연은 헝가리어로 뭘까」중에서
더 이상 엎드려 그림 그리지 않는 나이가 되고 나니 집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종이 위에 그린 집과 달리 현실 속 집에는 집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빽빽한 숫자들,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 사이의 괴리, 빌리고 싶은 것과 빌릴 수 있는 것의 차이. 그 사이로 고이는 막막함과 고단함. 더불어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디서 살 것인가’가 은근하고 촘촘하게 연결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살다’라는 단어가 가지는 폭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놀라곤 한다. (…) 그래서 짬을 내어 낯선 곳에 방문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 좋다. 새로운 환경에서 잠깐이나마 살아보는 동안 감각은 더욱 민감해진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 것인지 탐색하는 일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롭게 맞닥뜨리는 작은 경험들이 모여 나란 사람의 레이어를 두텁게 만들어주니까. 어떤 도시의 집은 가볍게 머무르는 것이 좋았고, 또 다른 집은 흠모하는 대상이 되었다. 여권을 찢어버리고 영영 머물고 싶은 곳도 있었다. 그 과정을 지나며 이런 도시의 이런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다는 꽤 구체적인 생각이 자리를 잡는다. 집을 이루는 구조처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다.
---「집의 기억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