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들어서 네덜란드의 지폐 디자인은 더욱 자유분방해졌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발행된 길더 시리즈는 플랑드르 문화의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부분을 드러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옥세나아르에게 디자인을 제안하면서 과감한 시도를 요구했고, 옥세나아르도 대중의 기대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에 입각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 pp.52-53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앞면에 등장하는 새도 바로 라기아나 극락조다. 2007년 이전에 발행된 지폐에서는 전면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8년 이후에는 크기가 축소되어 왼쪽 상단에 자리하게 되었다. 어느 부분에 위치하든 극락조의 기세등등한 자태는 변함없이 파푸아뉴기니 지폐의 주제라 할 수 있다. --- p.66
세계 화폐의 발행 품목과 수량을 살펴보면 국경을 초월해 지폐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콜럼버스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다. 1874년 미국 퍼스트은행이 발행한 1달러 지폐의 앞면에는 콜럼버스와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미국은 콜럼버스를 남의 땅을 강제로 차지한 인물로 여기는 동시에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의도와 야심을 널리 선포하는 인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 p.107
미신 때문에 네 윈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전대미문의 소동, 즉 화폐 개혁을 일으켰다. 1985년부터 미얀마 군사정부는 20, 50, 100차트를 회수하고 75차트 신권을 발행해 네 윈의 75세 생일을 경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년 후 군사정부는 또 예고 없이 25, 35, 75차트의 발행을 중지하고 오로지 45, 90차트 지폐의 유통만을 허락했다. 두 숫자는 9로 나누어 완전히 떨어지는 동시에 네 윈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였다. --- p.146
1995년 발행한 50파운드 지폐는 의외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쥘 베른이 반란의 상징으로 묘사했던, 매우 변덕스럽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지브롤터의 원숭이가 여왕의 머리 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반항적인 행동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경건하지 못한 구도와 디자인은 보수 인사들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 p.167
1,000리엘이 과거 지폐와 크게 다른 점은 앞면의 도안이다. 앞면에는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바로 희망이 가득하고 낙관적인 기개가 돋보이는 여학생의 미소다. 여학생은 자신감과 긍지가 충만한 얼굴로 침착하면서도 긍정적인 광채를 발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빛나는 미래가 머지않았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 p.208
1957년 이전의 프랑은 아카데미즘의 유미주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 국가은행이 1941년부터 1950년까지 발행하고 유통한 프랑 시리즈로, 액면가가 낮은 5, 10, 20프랑에는 순수한 전원 풍경이 인쇄되어 있다. 그림에는 남녀노소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의 동작과 표정에는 여유와 만족감이 드러난다. --- p.218
1993년 1월 정부는 모든 홍콩달러 동전과 지폐를 홍콩 주권 반환에 따라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부터 HSBC 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지폐의 양식을 갱신하면서 식민지 색채를 띤 디자인을 없앴다. 그중에서도 홍콩의 식민지 휘장인 ‘아군대로도'를 없앤 것이 가장 중요하다. --- p.234
‘데바라자’의 법적 정통성을 계승한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에 즉위해 2016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국가원수였다. 1946년 최초로 지폐에 등장한 이래 그는 줄곧 태국 지폐의 영원불변한 주제가 되고 있다. 지폐를 통해 전 국민에게 슬기와 지혜, 뛰어난 지도력을 지닌 국왕의 위대한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 p.262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62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후 알제리 중앙은행이 처음 발행한 화폐 알제리디나르는 예술적인 면에서 여전히 프랑스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고 있다. 피사로 스타일의 광택과 들라크루아 스타일의 화려한 색채가 바로 그러하다. --- p.270
2007년 12월 후진 개발도상국을 ‘졸업’한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발전한 곳이다. 카보베르데의 지폐 디자인에서는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와 대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카보베르데에서는 심각한 충돌이 발생한 적이 없었고, 국민들은 관광업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에 지폐 스타일 또한 갈수록 아름답고 화려해지고 있다. --- p.296
음악, 문학, 과학 분야에서 기적을 창조한 민족은 왜 세기마다 전쟁을 일으켰을까. 지폐에 등장하는 초상화의 미세한 눈빛과 자태를 해석할 수 있다면 독일인이 무슨 이유로 양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는 병적 상태와 자아 모순에 빠졌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