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서는 아래와 같은 10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문에서는 화엄경은 근본체성을 높이 들어 표시하였다.
제2문에서는 그와 같은 화엄경을 특별히 찬탄하였다.
제3문에서는 교화의 주인인 법신부처님은 생각하여 알기 어려움을 밝혔다.
제4문에서는 화엄경은 그 설법하는 의식이 넓고 두루 하다는 뜻을 밝혔다.
제5문에서는 화엄경의 말씀은 근본과 지말을 모두 갖추었음을 밝혔다.
제6문에서는 화엄경의 지취(旨趣)는 깊고 미묘하다는 뜻을 밝혔다.
제7문에서는 화엄경은 이익을 이룸이 몰록 뛰어넘었음을 밝혔다.
제8문에서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크고 넓고 심원함을 맺어서 찬탄하였다.
제9문에서는 청량스님께서 화엄경 만난 것을 감격하고 경사로 여김을 밝혔다.
제10문에서는 화엄경의 이름과 제목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 p 6~7
왕복 무제
往復이 無際나
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다.
가장 먼저 만유제법의 근본체성이 되는 것을 드러내어 표시하였다. 그것은 곧 법계(法界)라는 말이다. 만유제법을 세분하면, 사람을 위시하여 일체 생명의 세계가 있고 그 생명들이 의지하여 머물고 있는 세계인 지구가 있고 또 우주와 은하계가 있다. 그리고 다시 깨달음의 세계인 미혹의 세계가 있다. 이 모든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작용까지를 통합해서 법계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만유제법의 근본체성이 되는 법계란 어떤 내용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 법계의 작용(作用)으로서 “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즉 가게 되면 돌아오게 되고, 돌아오면 또 가게 되고 하는 일이 끝이 없이 반복된다. 또 일어나면 소멸하게 되고, 소멸하면 일어나게 되는 일이 끝이 없이 반복된다. 또 움직이면 조용하게 되고, 조용하면 움직이게 되는 일이 끝이 없이 반복된다. 이것은 우리들 인생과 삼라만상과 우주만유가 존재하는 존재원리다.
이 세상에는 이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무엇이든 이 원리에 다 적용이 된다. 춘하추동이 그렇고, 생로병사가 그렇고, 생주이멸이 그렇고, 흥망성쇠가 그렇다. 이것이 법계의 작용으로서의 한 내용이다.
// p 21~22
부유만덕 탕무섬진
富有萬德이나 蕩無纖塵이로다
넉넉하고 풍성함에는 만덕(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에는 작은 먼지 하나마저 없도다.
다시 세존의 특별한 점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있음의 입장으로는 넉넉하고 풍성하여 만행 만덕을 가지셨고, 없음의 입장으로는 텅 비어 없어서 아주 작은 먼지 하나마저 없다. 다시 정리하면 세존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말 송곳을 꽂을 땅도 없으며 송곳마저 없다. 어찌 먼지만 한 번뇌나 무명이나 망상이나 장애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세존에게는 없는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넘쳐난다. 온 우주의 만 중생을 다 호의호식하게 하고도 그대로 남는다. 이 얼마나 풍성한 살림살이인가.
그러므로 화엄경 제80권 맨 마지막 부분에서 부처님의 다함이 없는 공덕을 찬탄하기를,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큰 바닷물까지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을 얽어매어도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네.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라.”라고 하였다.
// p 32~33
기위지야 명진체어만화지역
其爲旨也여 冥眞體於萬化之域하고
그 종지(宗旨)가 됨이여, 참다운 본체는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 가만히 부합하고
화엄경의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고 한 것은 곧 법계의 지취가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화엄경은 법계를 밝힌 말씀이므로 그 말씀이 깊고 미묘하지 아니하면 어찌 깊고 미묘한 법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깊고 미묘한 법계를 설명하여 밝히는데 네 가지 법계를 들어 말하였다. 즉 이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와 이사무애법계(理事無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法界)가 그것이다. 화엄경은 법계 일체 존재의 깊고 미묘한 지취를 이 네 가지 법계를 들어 설명하는데 특히 사사무애법계의 이치를 자주 열거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理)와 사(事)는 어떠한 관계이며, 이와 사가 걸림이 없고 사와 사가 걸림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므로 역대 화엄의 종장(宗匠)들은 걸림이 없는 이치에 대해서 열 가지 깊은 내용을 정리하여 십현문(十玄門)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였다.
법계의 삼대(三大)를 보이는데 삼대란 체대(體大)와 상대(相大)와 용대(用大)이다. 즉 법계의 근본취지[宗旨]에는 참다운 본체가 있고, 덕의 모습이 있고, 그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 p 52~53
진가위상항지묘설 통방지홍규
眞可謂常恒之妙說이며 通方之洪規며
참으로 항상하는 미묘한 설법이며, 시방에 통하는 드넓은 법규며
화엄경의 설법 내용이 시간적으로 항상하고 공간적으로 두루 함을 밝혔다. 화엄경의 설법은 진리를 깨달은 바대로 설한 내용이다. 중생들의 근기와 수준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맞춰서 알맞게 설법한 것이 아니다. 진리란 시간적으로 어느 때는 있다가 어느 때는 없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항상한 것이다. 그와 같은 진리성에 맞게 설하려면 설법 또한 항상한 미묘한 설법이라야 한다. 그것을 상설(常說)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설하면 있고 설하지 아니하면 없는 그와 같은 설법이 아니다. 그래서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谿聲便是廣長舌]이라고 간략히 밝힌 것이다.
한편 화엄경의 설법은 역시 진리를 깨달은 바대로 설한 것이므로 공간적으로 시방세계에 다 통하는 드넓은 법규이다. 진리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니므로 변설(?說)이라 한다. 즉 진정한 화엄경은 언제 어디서나 쉬지 않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거나 공간적으로 빈 곳이 있다면 모르려니와 그렇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면 상설변설(常說?說)일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 p 97~98
대이광겸무제 방이정법자지 광즉칭체이주
大以曠兼無際하고 方以正法自持하고 廣則稱體而周하고
대(大)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方)은 정법으로써 자성을 지녔음이요, 광(廣)은 체에 합하여 두루 함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일곱 글자의 제목을 간략하게 해석하였다. 비록 화엄경이라는 경전의 제목을 간략히 해석하고 있지만 이 화엄경은 다른 경전과 다르므로 우주만유의 이치를 빠짐없이 다 담고 있어서 제목의 일곱 글자도 또한 우주만유의 이치를 다 담고 있다.
대大는 ‘크다, 위대하다, 넓다, 두루 하다’라고 하는데 무엇이 그렇게 큰가. 깨달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에서부터 모래알과 돌과 흙과 나무와 물 한 방울과 바람 한 줄기와 사람을 위시한 온갖 생명체와 지구와 달과 태양과 별과 저 드넓은 허공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 온갖 만유가 모두 다 크고 위대하고 넓고 두루 하다는 뜻이다. 먼지와 모래와 돌과 흙 따위가 어째서 그렇게 큰가. 먼지와 모래와 돌과 흙 하나하나에도 이 지구 45억 년의 기록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이치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크고 위대하고 넓다 하지 않겠는가.
// p 110~111
--- 본문 중에서
왕복서는 아래와 같은 10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문에서는 화엄경은 근본체성을 높이 들어 표시하였다.
제2문에서는 그와 같은 화엄경을 특별히 찬탄하였다.
제3문에서는 교화의 주인인 법신부처님은 생각하여 알기 어려움을 밝혔다.
제4문에서는 화엄경은 그 설법하는 의식이 넓고 두루 하다는 뜻을 밝혔다.
제5문에서는 화엄경의 말씀은 근본과 지말을 모두 갖추었음을 밝혔다.
제6문에서는 화엄경의 지취(旨趣)는 깊고 미묘하다는 뜻을 밝혔다.
제7문에서는 화엄경은 이익을 이룸이 몰록 뛰어넘었음을 밝혔다.
제8문에서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크고 넓고 심원함을 맺어서 찬탄하였다.
제9문에서는 청량스님께서 화엄경 만난 것을 감격하고 경사로 여김을 밝혔다.
제10문에서는 화엄경의 이름과 제목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p 6~7
왕복 무제
往復이 無際나
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다.
가장 먼저 만유제법의 근본체성이 되는 것을 드러내어 표시하였다. 그것은 곧 법계(法界)라는 말이다. 만유제법을 세분하면, 사람을 위시하여 일체 생명의 세계가 있고 그 생명들이 의지하여 머물고 있는 세계인 지구가 있고 또 우주와 은하계가 있다. 그리고 다시 깨달음의 세계인 미혹의 세계가 있다. 이 모든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작용까지를 통합해서 법계라고 일컫는다.
그렇다면 만유제법의 근본체성이 되는 법계란 어떤 내용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 법계의 작용(作用)으로서 “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즉 가게 되면 돌아오게 되고, 돌아오면 또 가게 되고 하는 일이 끝이 없이 반복된다. 또 일어나면 소멸하게 되고, 소멸하면 일어나게 되는 일이 끝이 없이 반복된다. 또 움직이면 조용하게 되고, 조용하면 움직이게 되는 일이 끝이 없이 반복된다. 이것은 우리들 인생과 삼라만상과 우주만유가 존재하는 존재원리다.
이 세상에는 이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무엇이든 이 원리에 다 적용이 된다. 춘하추동이 그렇고, 생로병사가 그렇고, 생주이멸이 그렇고, 흥망성쇠가 그렇다. 이것이 법계의 작용으로서의 한 내용이다.
p 21~22
부유만덕 탕무섬진
富有萬德이나 蕩無纖塵이로다
넉넉하고 풍성함에는 만덕(萬德)을 가지셨고, 텅 비어 없음에는 작은 먼지 하나마저 없도다.
다시 세존의 특별한 점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있음의 입장으로는 넉넉하고 풍성하여 만행 만덕을 가지셨고, 없음의 입장으로는 텅 비어 없어서 아주 작은 먼지 하나마저 없다. 다시 정리하면 세존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말 송곳을 꽂을 땅도 없으며 송곳마저 없다. 어찌 먼지만 한 번뇌나 무명이나 망상이나 장애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 세존에게는 없는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넘쳐난다. 온 우주의 만 중생을 다 호의호식하게 하고도 그대로 남는다. 이 얼마나 풍성한 살림살이인가.
그러므로 화엄경 제80권 맨 마지막 부분에서 부처님의 다함이 없는 공덕을 찬탄하기를,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큰 바닷물까지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을 얽어매어도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네.
이러한 공덕 바다 누가 듣고서
기뻐하며 믿는 마음 내는 이들은
위에 말한 공덕을 얻게 되리니
여기에서 의심을 내지 말지라.”라고 하였다.
p 32~33
기위지야 명진체어만화지역
其爲旨也여 冥眞體於萬化之域하고
그 종지(宗旨)가 됨이여, 참다운 본체는 만 가지 변화의 영역에 가만히 부합하고
화엄경의 지취가 깊고 미묘하다고 한 것은 곧 법계의 지취가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화엄경은 법계를 밝힌 말씀이므로 그 말씀이 깊고 미묘하지 아니하면 어찌 깊고 미묘한 법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깊고 미묘한 법계를 설명하여 밝히는데 네 가지 법계를 들어 말하였다. 즉 이법계(理法界)와 사법계(事法界)와 이사무애법계(理事無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法界)가 그것이다. 화엄경은 법계 일체 존재의 깊고 미묘한 지취를 이 네 가지 법계를 들어 설명하는데 특히 사사무애법계의 이치를 자주 열거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理)와 사(事)는 어떠한 관계이며, 이와 사가 걸림이 없고 사와 사가 걸림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므로 역대 화엄의 종장(宗匠)들은 걸림이 없는 이치에 대해서 열 가지 깊은 내용을 정리하여 십현문(十玄門)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였다.
법계의 삼대(三大)를 보이는데 삼대란 체대(體大)와 상대(相大)와 용대(用大)이다. 즉 법계의 근본취지[宗旨]에는 참다운 본체가 있고, 덕의 모습이 있고, 그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p 52~53
진가위상항지묘설 통방지홍규
眞可謂常恒之妙說이며 通方之洪規며
참으로 항상하는 미묘한 설법이며, 시방에 통하는 드넓은 법규며
화엄경의 설법 내용이 시간적으로 항상하고 공간적으로 두루 함을 밝혔다. 화엄경의 설법은 진리를 깨달은 바대로 설한 내용이다. 중생들의 근기와 수준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맞춰서 알맞게 설법한 것이 아니다. 진리란 시간적으로 어느 때는 있다가 어느 때는 없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항상한 것이다. 그와 같은 진리성에 맞게 설하려면 설법 또한 항상한 미묘한 설법이라야 한다. 그것을 상설(常說)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설하면 있고 설하지 아니하면 없는 그와 같은 설법이 아니다. 그래서 시냇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님의 광장설법[谿聲便是廣長舌]이라고 간략히 밝힌 것이다.
한편 화엄경의 설법은 역시 진리를 깨달은 바대로 설한 것이므로 공간적으로 시방세계에 다 통하는 드넓은 법규이다. 진리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니므로 변설(?說)이라 한다. 즉 진정한 화엄경은 언제 어디서나 쉬지 않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거나 공간적으로 빈 곳이 있다면 모르려니와 그렇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면 상설변설(常說?說)일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p 97~98
대이광겸무제 방이정법자지 광즉칭체이주
大以曠兼無際하고 方以正法自持하고 廣則稱體而周하고
대(大)는 드넓고 끝없음이요, 방(方)은 정법으로써 자성을 지녔음이요, 광(廣)은 체에 합하여 두루 함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일곱 글자의 제목을 간략하게 해석하였다. 비록 화엄경이라는 경전의 제목을 간략히 해석하고 있지만 이 화엄경은 다른 경전과 다르므로 우주만유의 이치를 빠짐없이 다 담고 있어서 제목의 일곱 글자도 또한 우주만유의 이치를 다 담고 있다.
대大는 ‘크다, 위대하다, 넓다, 두루 하다’라고 하는데 무엇이 그렇게 큰가. 깨달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에서부터 모래알과 돌과 흙과 나무와 물 한 방울과 바람 한 줄기와 사람을 위시한 온갖 생명체와 지구와 달과 태양과 별과 저 드넓은 허공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 온갖 만유가 모두 다 크고 위대하고 넓고 두루 하다는 뜻이다. 먼지와 모래와 돌과 흙 따위가 어째서 그렇게 큰가. 먼지와 모래와 돌과 흙 하나하나에도 이 지구 45억 년의 기록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이치를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크고 위대하고 넓다 하지 않겠는가.
p 110~111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