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그저 ‘걸어야’ 제 맛이고 ‘밟아야’ 추억에 남는다는 말은 정답이다. 투어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서니 좁다란 골목길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져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정경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과일가게, 정육점, 옷가게, 파스타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초록 덩쿨을 늘어뜨린 집들은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처럼 예뻤다.
--- ‘흘러간 시간을 살고 있는, 이탈리아’ 중에서
삶은 영화보다, 드라마보다 아름답다. 추억은 숭고하다. 지금도 프라하의 그 석양, 늙으신 아버지와 내가 가장 예뻐하던 막내 여동생과 함께 걸어 내려오던 성문 길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 ‘유럽의 음악학교, 체코’ 중에서
내가 왜 저 어린 주원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온 걸까. 어차피 떠나야 했던 여행이라면 절대 타이트하게 여행일정을 짜서는 안 된다는 걸 절감했다. 박물관 관람 중간중간 널찍한 공원에서 여독을 풀 수 있게끔 뛰놀게 해야 하고, 아이가 지쳐서 ‘이제 그만 갈래’ 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했다.
--- ‘달콤쌉싸름한 매력, 영국’ 중에서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지에서는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꼭 봐야할 곳을 먼저 정한 뒤 중요한 순서대로 동선을 잡는 것이 좋다. 우리에겐 당연히 인어공주 동상이 최우선이었다. 대충 지도를 보니 중앙역에서 북동쪽, 그러니까 지하철로 서너 정거장쯤에 동상이 있고, 그곳에서 게피온 샘, 처칠 공원, 아말리엔보르 궁전, 로젠보르 궁전, 크리스티안보르 성을 거쳐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최선인 듯했다. 갈 때는 지하철로, 올 때는 도보로! 좀 무리일까도 싶었지만 일단 강행하기로 했다.
--- ‘질박한 아름다움, 덴마크’ 중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헬싱키의 풍광은 적막하고 삭막했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엔 지나치게 소박해서 당황스러웠다. 단지 눈이 많이 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톡홀름처럼 고풍스런 건물이 많지도 않았고, 그저 휑하니 넓고 황량한 평지와 공장처럼 보이는 회색 빌딩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유럽 사람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스키를 신고 태어난다’더니, 꽝꽝 언 호수를 스키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만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 ‘따뜻한 눈의 나라, 핀란드’ 중에서
순간 멍해진 나는 곧 그 뜻을 알아채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다. 그 귀여운 천사들은 늦둥이 주원이가 태어날 때부터 스톡홀름에 올 때까지 매일매일 먹었던 남양분유 ‘앱솔루트 명작’에 그려진 그 천사들이었다. 수천만 원짜리 스피커로 들어야만 베토벤의 감동을 느끼는 게 아니듯, 오리지널 명작을 봐야만 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리라. 물론 시온이는 분유 깡통의 두 천사가 원래 어디 살던 애들인지, 이 머나먼 독일 땅 드레스덴에 와서야 알 수 있었겠지만.
--- ‘잿빛 역사를 간직한, 독일’ 중에서
그날 밤 민박집에서 시온이는 제법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동양인을 무시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여전히 프랑스보다 힘이 없다는 거지?” 내가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 흑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국 돌아가면 우리도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야.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시온이도 알겠지?”
--- ‘사랑스럽지만 사랑할 수 없는, 프랑스’ 중에서
아이들과 여행할 때 가장 힘든 것이 ‘기다리기’다. 그것도 줄서서 기다리기! 주원이가 30분 동안 줄에서 이탈하지 않고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 있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난간 밖은 바로 강물이었다. 잠시 망설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원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사람들 눈치보는 것도 이골이 나 바로 아이를 안아 올렸는데, 맙소사, 기저귀에 응가를 한 것이다. 배 안이면 몰라도 줄을 선 상태에서 기저귀를 갈 자신이 없었다. 주원이의 칭얼거림은 더욱 거세졌다. 아, 이제 8분만 더 기다리면 유람선을 탈 수 있는데……. 나는 눈물을 머금고 줄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유람선이고 뭐고 아이의 기저귀를 벗겨낸 뒤 물로 깨끗이 씻어줘야 하는 게, 엄마인 내가 그 순간 해야 할 일이었다.
--- ‘알프스의 빙하와 만년설의 낭만, 스위스’ 중에서
청동,대리석,화강암,석고 등 다양한 소재로 빚어진 조각상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실감나게 새겨져 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듯 조각상이 일제히 벌거벗은 형상이다. 아기를 번쩍 들어 올린 채 춤을 추는 듯한 엄마의 조각상이 가장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라는 생각에, 고생을 바가지로 하고 있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두 아이춿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축복임을 상기하면서.
--- ‘고요한 숲의 나라, 노르웨이’ 중에서
아이들은 웁살라성 아래의 잔디밭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 푸른 잔디밭을 밟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는 집에서 싸온 김밥과 유부초밥을 나눠먹으며 대학도시의 평화와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즐겼다. 사진 속 이 자그마했던 시온이와 주원이는 그때보다 두 배나 자라서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으니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 그리운 웁살라, 그리운 스웨덴.
--- ‘풍요로운 햇살이 일렁이는, 스웨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