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武亭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다. 한동안 본명이 김무정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에 사는 무정의 8촌 조카 김하수金河壽가 무정의 본명을 김병희로 얘기하면서 비로소 본명이 알려졌다.
1924년 중국에서 군관학교에 다닐 때 실제 전투에 참가해서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를 기특하게 여긴 그의 상관이 군인을 뜻하는 ‘무武’ 자를 넣어 지어 준 이름이 무정이다. 그래서 특이한 이름 ‘무정’을 갖게 되었다. 한자로는 武丁, 武靜 등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武亭으로 썼다. 무정이 스스로 쓴 팔로군 간부이력표가 중국 중앙당안관(정부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武亭으로 써 놓았다. --- pp.37~38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무정은 ‘사꾸라 몽둥이櫻棒子’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조선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있었다. 매년 운동회가 열렸는데, 이때에는 상하이에 사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모여 명절을 쇠듯 했다. 한인들 사이에는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큰 모임이 열릴 때면 서로 논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번은 어떤 이가 무정을 보고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했다. 무정은 그 자리에서 사꾸라 몽둥이로 그 사람을 쳤다. 그 바람에 모두들 혼비백산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무정의 별명이 사꾸라 몽둥이가 되었다. --- p.47
무정은 입북 직후 북한정치의 중심부로 뛰어든다. 그의 정치적 무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들었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국가 건설 과정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던 정치 세력은 모두 다섯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만주파, 중국 옌안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이던 연안파,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하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따라 입국한 소련파, 국내에서 좌파 지하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국내파, 그리고 우파 입장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민족주의 세력 등이 그들이다. 만주파는 전투적 투사형이면서 순박한 면도 있었고, 연안파는 온화한 선비형이었으며, 소련파는 관료적이었다. 국내파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기반으로 한 만큼 철저한 혁명주의자들이 많았고, 민족주의 세력은 사회혁명보다는 완전한 독립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파였다. --- pp.143~144
무정은 해방 직후 북한과 남한에서 높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던 좌익 인사들 사이에서도 지지도가 높았다.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전신인 재일조선인연맹의 부위원장을 지낸 김정홍의 말에 따르면, 좌익 계열의 재일교포들이 재일조선인연맹을 중심으로 군중대회를 열 때면, 해방 직후에는 박헌영의 초상만을 걸다가 차츰 김일성과 무정의 초상을 함께 걸었다고 한다. 해외의 좌익 인사들도 박헌영, 김일성과 함께 무정을 한국 공산주의의 핵심 인물로 꼽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 p.170
무정에 대한 비판은 김일성이 직접 했다. 긴 연설문을 읽으면서 비판했다. 연설문은 당시 당중앙위 부위원장 김창만이 쓴 것이었다. 김창만은 원래 최창익 계열이었다. 1943년 최창익과 무정이 독립동맹 내부에서 노선 다툼을 벌일 때 무정 쪽으로 돌아섰다. 김창만은 옌안에서 무정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활동을 하다가 북한에 들어가 초기에는 무정을 수행하면서 그를 영웅화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무정과 김일성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김일성 쪽에 가담했다. 소련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이 절대 유리한 상황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전?선동에 능해 당 선전부장을 거쳐 중앙위 부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 연설 가운데 무정 비판 부분은 이렇다.
다른 실례로 군대에서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전투를 옳게 조직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많은 손실을 가져오게 한 무정은 제2군단장의 직위에서 철직당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처벌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퇴각하는 과정에서 혼란된 상태를 리용하여 아무런 법적 수속도 없이 사람을 마음대로 총살하는 봉건시대의 제왕과도 같은 무법천지의 군벌주의적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법적으로 처단받아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들은 비겁주의자들과 패배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류망 행동이며 아무런 조직 생활도 무시하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 pp.259~260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 수립은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등 많은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김일성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거물 정적과 그의 세력에 대한 숙청 작업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서상으로 본다면 가장 먼저 오기섭을 권력 중심에서 몰아내고, 무정을 숙청한 다음, 박일우?허가이를 제거했고, 이후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파를 제거한 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거 숙청했으며, 1967년에는 박금철 중심의 갑산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따라서 무정 숙청은 지금까지도 그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김일성 유일체제 수립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서 실시된 무정에 대한 숙청은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된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전략이 출발하는 지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정의 숙청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유일지도체제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초기의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 북한정치사의 주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무정을 숙청하는 데 실패했더라면 이후 이어지는 연안파의 또 다른 리더 박일우, 소련파의 수뇌 허가이,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 등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pp.328~329
해방 정국 이북 지역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초기 북한 군부의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무정은 국가 건설 전략, 분단의 극복 등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정이 김일성과 갈등, 반목하게 된 데에는 그들 사이의 이념과 노선 차이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무정은 기본적으로 누구보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좌우익을 막론하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족통일전선론을 주장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약소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국제연대주의자였고, 직업과 신분 등에 따른 차별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주의 노선을 견지했고, 대화를 통한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 p.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