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과 대마초, 이런 거에 의존하면 안 돼요.”
헉! 이 남자가 내 생활을 어떻게 알았을까?
“한국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펼치려고 이곳에 온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게 제 뜻도 아니고, 어느 날 보니 저는 그냥 이곳에 툭 떨어져 있네요. 누구죠? 몇 푼의 돈으로 나를, 아니 내 인생을 원격조종하는 사람은?”
유미는 결국 또 그 질문을 유진에게 하고 말았다.
“여기 갑자기 오게 된 거, 오유미 씨의 의지가 아니라서 힘들다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로 이 기회를 새로운 변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잖아요? 그게 바로 오유미 씨의 능력이고 또 운명입니다.”
나의 능력과 운명이라……. 유미는 그 말이 너무도 무거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숨 끝에 갑자기 눈물방울이 곰탕 국물에 툭, 떨어졌다. 유미는 그걸 들키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수저를 놓고 외투를 입었다.
“약속이 있어서 가 봐야겠어요.”
그 말을 듣자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가지 말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지만, 유미는 곰탕 국물을 삼키면서 꾹 밀어내 버렸다.
“그래요. 어서 가 보세요. 오늘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유진은 유미를 잠시 바라보다 망설이듯 말했다.
“명심해요. 이곳은 에이즈의 천국이라는 걸.”
“……?!”
“자유로움과 자유분방함은 다르죠. 발레리라는 여자 친구는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이 남자, 발레리를 어떻게 알지? 의아해하는 유미의 표정을 무시하고 유진은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유진이 돌아서며 유미에게 말했다.
“오유미 씨, 프랑스 나이로 스물여섯 살이죠? 청춘은 이렇게 탕진하기에 너무 아까워요.”
그 말을 하는 유진의 눈빛은 진실해 보였다.
이유진은 유미가 힘들 때 SOS를 요청하면 다가와 그렇게 애틋하게 도와주었지만, 어딘지 몸을 사리는 구석이 많았다. 당시 그에게는 한두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었다. 유미가 가까이할 빈틈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으면 유미에게 너무나 초연하다고나 할까? 모욕적일 정도로 무관심하다고나 할까? 유미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거리를 둔 채 이유진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무심하다가도 유미의 얌전하지 못한 생활을 알게 되면 선생님이나 고지식한 오빠처럼 굴었다. 그럴수록 유미는 오히려 더 관심을 끌려는 비행 청소년처럼 굴게 되었다. 천성이 호기심 많은 유미는 더욱더 자유분방하게 지냈고, 그것을 일부러 이유진에게 약 올리듯 알리곤 했다. 이유진은 그럴 때마다 큰 관심을 보였고, 유미는 그런 그의 태도가 재미있었다. 유미는, 너 이래도 안 넘어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유미에게는 유혹 종결자로서의 근성과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종국에는 유미가 나체주의자들의 해변 캠프에 참여하는 문제로 유진과 싸운 게 그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 피는 뜨겁고 생각은 미숙한 20대 시절의 이야기다. ---pp.30~32
이상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발가벗고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지금 유미는 발가벗은 사람들 틈에서 이상한 부자유스러움을 느낀다. 불평등을 느낀다. 발레리는 인간의 몸이 표현하는 보디랭귀지는 세계 공용의 언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미는 지금 자신이 벙어리, 그저 마네킹처럼 무력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보디, 즉 자신의 몸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세계 공용어와 소수자의 방언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감이었다.
(……)
성적 모험이나 욕망은 오히려 옷을 입은 세계에서 더 강렬하게 솟아나는 거 아닐까. 이런 나체촌에서 인간의 성적인 욕구는 오히려 초연해진다. 유미는 욕구는커녕 낯선 환경이 끔찍해서 당장이라도 파리에 올라가고 싶었다.
유미는 한참을 망설이다 유진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나 유미.”
“너, 어디니?”
“응, 캠프촌이야.”
“너 결국! 그래서, 재미있니?”
“나 적응이 안 돼서 텐트 안에 그냥 있어. 동양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쪽팔려.”
“너만 벗은 것도 아닌데 뭐가 쪽팔려.”
“그래서 말인데…… 오빠가 여기 오면 어떨까?”
“동양인 커플이 다니면 두 배로 더 쪽팔릴걸.”---pp.110~112
“아뇨. 난 훔쳐보는 게 좋아요. 어젯밤에 당신의 모습을 보고 저 그림을 찾아 걸어 놓고는 밤새도록 환상에 젖었어요. 행복했어요.”
관음증 환자인가? 그런 환자치곤 예술적인 심미안을 가졌다고 해야 하나. 갑자기 다니엘이 유미의 의표를 찌르듯 물었다.
“그런데 당신이 엉덩이를 내놓고 창가에 기댄 모습은 의도적이지 않았나요?”
(……)
다니엘이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요.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당신을 훔쳐보게 해 줘요.”
“이미 훔쳐보셨잖아요.”
“이제부터 허락을 해 줘요.”
“?!”
이 이상한 도둑질을 허가받고 하겠다는 건가? 유미는 이 괴팍한 프랑스 중늙은이의 청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보상은 충분히 하겠어요. 난 언제부턴가 그림 이외에는 모든 게 시들해졌어요. 심지어 소피와의 관계도 그래요. 그런데 이상해요. 당신을 훔쳐보는 그것이 너무 설레고 흥분되었어요. 가슴이 설레는 이 기분, 이걸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니 행복했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어요.”---pp.159~161
“용준, 다니엘 화랑을 통해 미술품을 거래할 땐 스페셜 영수증을 써 주겠다고 위에 보고해. 물론 그 차액은 돌려주겠다고.”
재벌이 비자금 조성을 위해서 신뢰로 다져진 화랑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편법이다. 화랑이 정가보다 부풀린 금액으로 작품을 팔아 돈을 받고 차액을 은밀하게 돌려주는 세탁 방법이다.
“아, 그게 가능해요? 그거야말로 YB에서 정말 원하는 건데.”
“가능하도록 해야지. YB에서는 이제 다니엘 화랑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테지?”
“당근이죠. 그런데 다니엘 화랑에서 먼저 그런 걸 제안하면 윤조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죠.”
“다만 세탁비로 차액 중 20프로는 뗀다고 해. 세탁소가 세탁비는 받아야 할 거 아냐.”
“그래도 좋은 조건일걸요.”
“데미안 허스트도 기대해도 된다고 해.”
“와우! 오케이 나면 제가 파리로 날아갈게요.”
유미는 또 런던의 에릭과 통화했다.
“아, 로즈! 잘 지내요? 아버지와 약혼했다는 기사 봤어요.”
“놀랐…… 죠?”
“네, 놀랐어요. 암튼 축하해요. 혹시 저와 재산 싸움 이런 거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난 나중에 젊고 예쁜 새엄마와 싸우긴 싫은데. 하하하…….”
에릭은 웃었지만 유미는 마음이 좀 아팠다.
“사실 비밀인데요. 그게…… 계약 약혼일 뿐이에요…….”
“계약 약혼?”
“일종의 비즈니스죠.”
---pp.20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