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 대영 제국 절정기라 할 수 있다는 빅토리아 시대보다는 파란만장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딱 어울리는 연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어수선한 시대에나 어울리는 연극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 시대의 모습이 결정적인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시대, 바로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을 다스리던 때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허울뿐인 법치주의. 그것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우리 시대가 공유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강력한 정부 없이 시작된 세계화의 물결은 우리를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처지로 만들어 버렸다. 테러리스트가 탄 비행기가 도심의 마천루로 돌진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약한 국제사법기구의 결정에 복종할 것인가, 자력 구제에 나설 것인가? 선택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본능에 충실한 선택은 일제히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본능에 쉽게 굴복한 자에게 남는 것은 재앙뿐이다. ---「제1장 아프간전쟁에 대한 미국의 불편한 진실」 중에서
[베니스의 상인]은 법에 통달한 자는 이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사사로운 복수의 충동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무력행사에 대한 독점권을 국가에 이양하는 법치주의에 순응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가가 권력을 남용할 때는 자기 자신을 제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는 성문법 원칙을 고수하고 일률적인 기준에 따라 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법 적용을 빙자한 국가의 권력 남용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사람에 의한 통치가 아닌, 법에 의한 통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물 전체를 흐리는 미꾸라지 같은 작자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놀라울 정도로 능수능란한 궤변으로 법리를 조작해 자신의 배만 불리는 약삭빠른 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변호사는 바라보는 사람들의 불신 가득한 눈초리에는 말만 번지르르한 이런 협잡꾼들을 저어하는 마음이 묻어 있다. ---「제2장 스캔들에 대처하는 변호사의 자세」 중에서
[자에는 자로]에서 셰익스피어는 ‘중용’이야말로 이상적인 잣대라는 자신의 철학을 은근히 내비친다. 셰익스피어는 이 희곡에서 기준 없는 관용만 있는 사회와, 법문을 자구에만 충실하게 해석한 나머지 관용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회의 예를 차례로 보여 준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을 사회를 가감 없이 그려 낸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역사에 길이 남은 대문호는 지혜로운 판결을 내리는 비결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판사의 자질에 대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자에는 자로]에 드러난 그의 철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관용’과 ‘법치주의’란 상행의 가치 중 어느 하나만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잣대’로는 우리 사회를 통치할 수 없다. 지혜로운 판결에는 직감에서 나오는 판단의 유혹을 뿌리치고 중용의 도를 걸어가겠다는 단호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다. ---「제3장 지혜로운 판사의 자질을 논하다」 중에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더 이상 사실을 확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거의 모든 사실 규명이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단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뜨거운 석탄을 옮겨 결백을 증명하거나 우리를 고소한 사람과 결투를 벌여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판사나 배심원들이 사실관계를 명쾌하게 밝혀 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이 믿음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혹 이성의 상아탑을 쌓았다 자부하는 금세기에도 [오셀로]에서와 같은 비극이 빚어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를 실증하기 위해 나는 이 장에서 [오셀로]와 1995년에 열린 한 재판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O. J. 심슨 재판 말이다. 오셀로와 O. J. 심슨이 둘 다 흑인이란 단편적인 공통점이 이런 조합의 선택 이유는 아니다. 그보다는 두 재판 모두 물적 증거가 다른 모든 증거를 압도해 버린 재판이란 점 때문에 이 둘을 연관 지은 것이다. 심슨 재판에서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물적 증거는 ‘피로 얼룩진 검은 장갑’이었다. ‘딸기 무늬’가 있는 흰 손수건 대신이랄까. 배심원들은 심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진상조사위원들이 한데 모여 진실을 규명하는 방식이 ‘시각적 증거’가 불러일으키는 편견에 얼마나 취약한지 몸소 보여 주었다. ---「제4장 피가 묻은 장갑은 심슨의 손에 맞지 않았다」 중에서
앞서 살펴보았듯이 헨리 4세는 병상에서 “그러니까 해리야, 불안한 민심을 외정에 돌려 여념이 없도록 하여라.”란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2003년에 실은 기사에서 헨리 4세의 이 의미심장한 조언을 인용하며 부시 대통령을 풍자했다. “올해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셰익스피어 공연은 어물쩍 왕위를 계승한 가문의 대한 의혹의 눈길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애먼 타국을 침공한 한 나라의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다. 조지 W. 부시 이야기냐고? 아니다. 헨리 5세 이야기다.” 런던 [옵서버]지도 부시의 포퓰리즘을 겨냥해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헨리 5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전투 전날 밤 광경이다. 이 밤에 현대에도 시사성 있는 화두를 던진 한 촌부가 있었다. 미덥지 않은 명분을 내세워 해외 원정에 나섰다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까? 변장을 하고 병사들 틈에 섞여 든 일국의 국왕은 일개 별사의 한마디에 진땀을 흘리며 구구절절 변명을 한다. 병사의 일갈은 이랬다. ‘원정의 동기가 옳지 못하다면, 왕은 굉장한 청산을 해야 할 게야.’” ---「제5장 헨리 5세와 조지 W. 부시」 중에서
[햄릿]을 통해 우리는 왜 현실 사회의 정의 구현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때로 지식인들을 탐탁지 않아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현실 사회를 관조하는 지식인들 덕에 이상적인 정의에 대해 숙도해 볼 기회가 생기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에만 얽매인 사고로는 현실을 담보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맥베스]에서 ‘몽상적 정의’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절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의를 살펴보았다. 셰익스피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햄릿]에서는 ‘몽상적 정의’에 대한 한층 더 고차원적인 시각을 피력한다. 바로 완벽한 정의만을 고집하는 반대자가 사회에 막대한 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역설 말이다. 서정적인 복수 비극 [햄릿]의 이면에는 현실과 유리된 몽상가들의 위험성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숨어 있다. ---「제7장 완벽한 정의 실현을 꿈꾼 지식인」 중에서
자, 이제 케케묵은 역사 이야기는 그만두고 오늘날을 돌아보자. 과연 우리 시대에 킨킨나투스, 프로스페로, 워싱턴의 현신이라고 이를 만한 사람이 존재하는가? 슬프게도 딱히 떠오르는 이가 없다. [폭풍우]가 제국주의를 풍자한 우화라는 전제하에, 나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을 연구하고 있는 동료 학자들에게, 식민지 개척자가 자발적으로 식민지 통치권을 포기한 사례가 있는지 물었다. 독립 전쟁이나 조약 때문에 독립을 허여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단 한 건도 없다는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미국 국내 상황만 놓고 본다면, 헌법상의 제약이 대통령의 야망을 억제하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제심을 발휘할 필요도 기회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제약이 없는 영역에서, 진정으로 이타적인 포기나 단념의 사례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즘 세상에 권력자가 내뱉은 ‘이제 물러나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란 발언은 ‘직위를 위협하는 스캔들에 휘말렸습니다.’란 말의 에두른 표현일 공산이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초라한 단상이다.
---「제9장 권력의 정점에서 은퇴를 선언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