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복음은 “세상에 대해 금식해서 절대자가 되어, 선택됨으로써 여러분 안에 그리고 여러분 밖에 있는 ‘나라’를 발견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고, 아기가 되는 사람만이 그 나라를 알아보고 그곳에 들어가게 되므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 p.7
그리스도인들이 신앙하는 목적의 중심에 ‘구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죄와 죽음에서 건져져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한다’는 구원의 장소가 소위 ‘천국(天國)’인데, 이 천국은 대다수 ‘죽어서 가게 되는 곳’이거나, ‘세상이 끝날 때 누리게 될 축복’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전자가 육체의 종말을, 후자는 세상의 종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런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결과중심주의에 빠지게 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선(善)해지려는 의도에서 출발하나 결국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대다수가 악(惡)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 p.12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이런 바울의 결정론적 방식의 구원과 천국을 추천하지 않았고,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바울과 달리 나라 자체가 ‘의(義)’이므로 ‘종말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인 ‘하나님의 의(義)’를 따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즉 예수는 ‘결과를 중심’으로 하는 바울의 방식이 아니라, ‘원인을 중심’으로 하는 근본적 방식을 제안했었습니다. 이 방식이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은 자신이 이전에 놓은 원인에 따라서 그 결과(종말)가 실현되고 있음을 자각하는 제대로 된 종말론인 셈입니다. ‘종말’은 바울의 길이지만, 예수의 길은 ‘원인’입니다. --- p.13
하지만 특정 결과에 대한 원인을 추적해서 밝혀내는 상당한 안목이 없이는 언제 어디서나 현존(現存)하는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합당했거나 미래에 합당할 ‘나라’를 지금 끌어와서 적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의 진실은 주로 그때에나 적합했거나 적합하리라는 것입니다. --- p.73
‘가난’이 아니라 ‘나라에 관련된 상황’이 중심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라’와 관련되어 점점 가까워지면 누구든지 기존 인연이 정리되고 사실상 물질적으로 가난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 정상이므로, 결국 가난해지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셈이 됩니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보이나 결국 ‘자발적 가난’입니다. --- p.109
‘도마 48’에는 “한집안에서 둘이 서로 평화로워져서 통합될 때, 이들이 산(tau)을 보고 ‘여기서 바뀌라(pwwne)!’고 말하면 산이 바뀔 것입니다.”고 하고, ‘도마 106’에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아담 같은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산이여! 여기서 바뀌라’고 말하면, 산이 바뀔 것입니다.”고 합니다. 필자도 이번에 콥트어 원문을 찾아 확인해보기 전에는 ‘산을 움직이다’로 알아왔는데, 이것은 오병이어(五餠二魚)와 함께 저에게 하나의 신화였습니다. ‘pwwne’는 사전에서도 ‘움직이다’가 아니라 ‘바꾸다’입니다. ‘움직이다’는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습관적인 번역입니다. --- p.123
인연과(因緣果)는 우리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이 악화할 수도 호전될 수도 있는 자유선택 기회가 지속해서 제공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그 기회가 제공되는 방식이 바로 ‘나라’인데, 이는 각자에게 제시되는 메신저와 주어지는 메시지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맞이하는 모든 현상에서 언제나 우주가 제시하는 고귀한 ‘나라’를 얻어낼 방법이 있는데, 그 나라를 알아보고 실천하면 상황이 호전되고 아니면 악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연기(緣起 pa?icca--- p.samupp?da)라고 합니다. --- p.139
용수가 거의 모든 대승불교의 연원에 자리하며 제2의 붓다 또는 대승의 종조(宗祖)로 불리듯이, 바울도 최고의 전도자이자 신학자로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중심인물이며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주창자로 불립니다.
붓다와 예수를 ‘있는 그대로 본받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용하자!’가 바로 바울과 용수의 방식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상당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바울과 용수의 표현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조언이지만, 주인공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입지를 부추기는 정보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오히려 혼돈을 제공하는 미끼였습니다. 이를테면 그 자체로 이율배반적이어서 끝없는 논란을 낳는 ‘세상은 공(空)이다’는 미끼를 물고, 이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하는 미늘에 걸려버린 수행인은 평생을 허비하게 되고 맙니다. ‘천국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미끼를 물고, 자신만은 그 구원받는 대상이 되려고 눈물겹게 노력하는 미늘에 걸려버린 종교인은 평생을 허비하게 되고 맙니다. --- p.164
신을 믿거나 수행하는 자들이 겉으로는 봉사를 내세우거나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포장하지만, 속셈을 따져보면 대다수 신의 덕을 입어서 부자가 되거나 명예를 얻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대부분 돈이나 명성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들의 근본 목적은 결국 권력을 확보하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교회나 성당, 절, 도장, 센터, 수련원 등을 가십니까? 만일 그 의도가 권력이라면 적어도 진리는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