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죽음과 만난다. “모든 인간에겐 태어난 순간에 하나의 화살이 쏘아진다. 그 화살은 날고 또 날아서 죽음의 순간에 그에게 이른다”고 말한 장 파울(Jean Paul, 1763~1825)의 말이 진지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죽음을 보지만 간접적일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슬픔과 고통, 죽음의 침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전율이다. 그래서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죽음을 외면한 채 터부시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과는 무관하게 삶에 부재한 것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러나 죽음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죽음이 우리의 삶을 끝내는 것이라면, 그 이후에 오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내세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예부터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었다. --- p.17
이 책은 문학적으로 형성된 죽음이 삶에 어떤 의미로 작용했느냐를 고대와 중세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철학이나 신학이 추구하는 소위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ㆍ개념적 질문보다는 비록 허구일지라도 문학 작품에서 표현된 죽음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사유할 수 있는, 사실적인 상징성을 지닌 구체적ㆍ심미적 질문에 대한 연구를 목표로 삼고 있다. 문학의 한계를 넘어서 철학, 종교, 심리학, 예술 등에서의 죽음에 대한 관찰은 오직 한 시대의 사조를 더 잘 파악해서 이미 문학작품에서 얻어진 것을 더 강화하고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런 전제 아래서 문학 외의 다른 학문적 시각에서의 죽음에 대한 관찰을 개괄적이나마 별도의 장에서 간략히 서술하였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죽음과 연관된 연구 분야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소수의 작가들과 작품들만을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연구가 우리나라의 독문학에서 적어도 최초로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분야의 학문에서도 유사한 시도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면에서 의미가 크다. --- pp.20~21
중세 전성기와 후기를 나란히 놓는다면, 죽음의 생각에서 큰 변화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 의한 죽음의 극복에 대한 상징은 전 중세 시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중세 후기의 죽음에 대한 생각의 변화란 중세 전성기처럼 죽음이 종교적ㆍ전체적으로 체험되지 않고, 현실적ㆍ개인적으로 체험된다는 데에 있다. 신과 세계는 더 이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죽음은 오직 더 심한 세상살이에 대한 벌로서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더 깊어지고, 죄의 대가로서 죽음에 대한 교의는 잔인하게 사람들을 속박한다. 죽음의 극복은 오직 개인에게 주어지고, 개인은 삶과 죽음 사이의 대결에 홀로 임할 수밖에 없다. 죽음의 문제가 점점 더 인간의 인식범위로 넘어오면서, 젊은 아내를 일찍 데려간 죽음에 항의하는 보헤미아의 농부처럼, 인간에겐 죽음에 대항해서 싸울 가능성이 주어졌다. 비록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이미 싹트기 시작한 그 가능성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실천할 수 없었다 해도, 그 가능성은 자의식과 고대예술에서 인간의 존엄과 위대함을 찾으려는 새로운 세대인 르네상스에서, 삶과 죽음의 대결의 새로운 형태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전체 중세 문학의 토포스인 ‘죽음을 기억하라’가 주는 정신사적 의미이다. --- pp.147~148
사람은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서 전율을 느끼고 세상과의 이별을 슬퍼한다. 죽음의 공포와 불가피성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깊은 울림으로 모든 시대를 사로잡고,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시대에 따라 상이한 특징을 나타낸다. 중세를 지배했던 ‘죽음을 기억하라’의 감정은 죽음에 대한 비탄이나 세상에 대한 분노를 심화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 그 감정은 인생과 삶의 아름다움에 속해 있는 것들을 자극하고 일깨운다. 사람들은 인도주의가 싹터가는 새 시대에 인생을 즐기고 인간의 아름다움과 신성을 추구하는 중요한 변화를 본다. 이제 ‘죽음을 기억하라’는 죽음의 감정은 이전 세기들에서처럼 더 이상 지배적으로 앞으로 밀치고 나가지 못하고, ‘삶을 기억하라(Memento vivere)’는 새로운 감정으로 발전한다. 비록 이 새로운 감정이 여전히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사물의 척도가 되는 새로운 인도주의의 감정이 성공적으로 대두하고, 불가피하게 죽음에 대한 생각도 새롭게 나타난다. --- p.197
인간에게 죽음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실제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함께 살아 갈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은 성숙해지고, 죽음은 인생의 결실로 나타난다. 파스칼이 생각했듯이, 완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은 바로크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바로크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는 생존 시에 문학적 죽음의 변용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인간 모두는 죽음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죽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죽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결코 사는 것을 배울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창조적인 변화이고 무상한 파괴가 아니라는 의식에서 삶의 성숙과 죽음의 성숙이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크의 가장 깊고 은밀한 영혼의 기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 앞에서 도망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현세적인 것을 올바로 인식하게 된다면,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p.239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죽음에 대한 시선은 인생을 심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든다. 내세에 대한 질문 역시 고전주의시대에서도 인생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고전주의시대에 추구된 합리주의는 역사철학적ㆍ현실적 숙고에 기초한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데에 기초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넘어선 완성의 가능성을 종교에서보다 인격형성의 목적을 향한 노력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에서 찾는다. --- p.315
깨어 있는 자는 사물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 자이다. 그 깨달음은 죽음을 내 안에서 싹터오는 존재로서, 영혼의 열매로서 마음속 깊이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최고의 목적으로서 자신의 성숙한 죽음을 만들려는 의지는 삶을 성숙과 완성으로 만든다는 깨달음이다. 릴케는 이 깨달음에 이른 자만이 죽음의 참된 진리를 찾는 꿈에 도취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도취 속에서 죽음은 “나의 종말에 있는 존재(Am-Ende-Sein des Ich)”이고, 경계가 없는 무한한 우주를 위해 열린 존재이며, 전체에서의 개체 해체이다. 이 죽음은 ‘불멸(Unsterblichkeit)’의 상징적 의미로 형성되었다. 무상한 이곳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고 은밀한 죽음의 긍정에서 인생을 찬미하기 위해서 인간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릴케의 문학은 삶을 찬미하는 죽음의 노래인 것이다. --- p.520
죽음에 대한 지식은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서 그 삶을 비유적으로 만들고, 그것이 감정을 확대시킨다. 때문에 우리 삶의 조건으로 부여된 언제나 깨어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은 자아상승과 자아실현을 만든다. 죽음의 경험은 삶의 경험이라는 것, 결국 그것은 인간애로 승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애는 죽음과의 영적교감을 통해서 심화되고 확대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애는 초기의 대립적 인생관을 극복하여 대립에 지배당하지 않고 역으로 대립을 지배하며 합을 이루는 기본적인 힘이다.
--- p.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