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 여전히 유효한 불교
도서1팀 인문 담당 손민규 (lugali@yes24.com)
2019-06-25
한때 일부 지식인은 종교가 사라질 거라 예측했다. 거칠게 표현해서, 세속화 이론이다. 현실은,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예전보다 덜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다. 새로운 종교도 많이 생겼다. 『논어』, 『맹자』, 『법화경』 등 고전도 꾸준히 나오고 읽힌다. 종교라는 표현이 다소 부담스럽다면, 고전이라고 바꿔도 무방하겠다. 시대가 변해도 꾸준히 읽히는 글이 고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 고전을 찾을까. 바로 삶이 힘들 때다. 이는 공자나 붓다가 가르침을 펼친 맥락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사회가 혼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안 보일 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에 대해 답한 내용이 바로 고전이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태어났을 때부터 쭉 힘들다. 앞으로도 괴로울 것이다. 누구나 가끔 하던 행동을 멈추고 탄식할 때가 있을 테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불교는 답한다. 나는 없다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라고. 이른바 무아다. 내가 없다는 게 진리라면, 일견 허무해지면서도 묘하게 안심된다. 그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건 다 환상이야... 그런데 여기서 존재하는 객관적인 세계를 무시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정신승리 및 허무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불교가 나온 맥락과 불교 철학의 내용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불교는 염세론이 아니다. 유심론도 아니다. 이를 넘어선 복잡한 - 어쩌면 단순한 - 사유 체계다. 불교의 무아는 브라만교의 범아일교를 극복하며 나온 사유이고, 오롯하게 불교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면 연기, 사성제, 팔정도 등 핵심 개념을 익혀야 한다. 쉽지는 않다. 이때는 불교 경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입문서가 필요하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는 제목 그대로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불교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홍창성 교수가 쓴 불교 철학 입문서다. 대개의 불교 입문서가 삼법인, 사성제, 십이연기, 팔정도 등에 관한 개념을 백과사전 식으로 설명하는 데 비해 이 책에서는 서양인들이 관심을 두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무아, 공, 불성의 개념을 학생들과 토론하며 나눈 대화를 예로 들며 소개한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불교를 처음 접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제기하는 질문은 불교 세계관의 참신함을 부각시키는 역할도 한다. 또 하나 주목할 지점은 저자가 밝히는 불교 철학의 현대적 의의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불교가 말하는 무아가 사실이라면, 도덕적 윤리적 주체로서 인간도 부정하는 셈인데, 이때 행위 당사자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냐는 질문에 불교적 세계관으로 답하기는 곤란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불변ㆍ불멸하는 아뜨만이나 영혼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몸과 여러 가지 종류의 의식 상태들이 모여 있는 이 오온 덩어리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면 어떨까?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동일한 인격체로서의 나의 존재마저 지나치게(?) 부정한다면,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면 전혀 다른 오온 덩어리가 될 어떤 다른 사람만 좋으라고 오늘 밤 내가 피곤을 무릅쓰고 양치질하고 세수할 이유가 없다.(247쪽)
이런 식으로 저자는 불교의 세계관을 현대라는 맥락에 맞춰 설명하려 애쓴다. 미국에서 이뤄진 수업답게, 불교와 다른 사상과 비교를 통해 설명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예컨대 불교의 중도를 설명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를 끌고 온다. 이러한 비교종교학적 접근은 다종교, 다문화 사회 꼭 필요한 작업인데 사실 무아라는 개념도 불교만의 독창적 사유는 아닌데 일찌기 흄은 자아를 관념의 다발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자아를 오온의 집산으로 본 불교의 통찰과 유사하다. 물론 여기서 불교는 철학적 사유에 그치지 않고 수행,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는 차이가 있다.
여하튼, 욕망 긍정의 시대. 나를 긍정하다 소진되는 시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이 책에서 중도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