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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서론: 십자가, 자아, 타자 제1부 1. 거리두기와 소속되기 2. 배제 3. 포용 4. 성 정체성 제2부 5. 억압과 정의 6. 기만과 진실 7. 폭력과 평화 해설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주제 찾아보기 성구 찾아보기 저자연보 |
Miroslav V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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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하게도 이 보고서는 가장 추상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다루는 부분에서조차도 대단히 개인적인 성격을 띠는데 , 이는 내가 감상적인 정서를 공적으로 마음껏 드러내려 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 책은 내가 내 정체성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들과 지적으로 씨름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이다 . 나는 막연하고 초연한 태도로 흥미로운 지적 퍼즐을 푸는 데는 관심이 없었으며, 불가능한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의 시민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는 서재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헌신과 욕망, 저항, 분노, 불확실성을 외투처럼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가 하루의 작업이 끝나면 다시 집어서 입는 식으로 책을 쓸 수 없었다. 내 동족은 짐승처럼 짓밟히고 있었으며,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어떻게 내가 나의 헌신, 욕망, 저항, 분노,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최대한 엄격하게 그것들을 곰곰이 따져 보아야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폭력의 세상 사이에 있는 긴장이 나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고자 하는 바람과 다른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지켜보거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지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영적 여정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 pp.14-15
이 세 가지 ‘해법’은 많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이 해법들은 사회적 구조(social arrangements)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 이런 제안에는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지만, 그 주된 관심은 사회적 행위자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나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다름을 수용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타자와 조화롭게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나의 전제는 자아가 특정한 상황 하에 놓인다는 것이다. 즉, 자아는 여성이거나 남성이고, 유대인이거나 그리스인이고, 부자이거나 가난하다. 대개는 동시에 이 중에서 하나 이상에 해당하며 (‘부유한 그리스인 여성’), 혼종적(混種的) 정체성(‘유대계 그리스인’과 ‘남성-여성’)을 지니는 경우도 많고, 한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적 자아(situated selves)에 관해 내가 던지는 질문은 이러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그들은 어떻게 타자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까? --- pp.29-30 장군들을 제쳐두고 철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충돌하는 정의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철학자에게 ‘무엇이 정의로운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누구의 정의 말인가?’ ‘어떤 정의 말인가?’라고 되물을 것이다. 미셸 푸코처럼 ‘정의’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제약 속에서 만들어진…이 세상의 것”(Foucault 1980, p. 131)이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포스트모던 사상가들만 이렇게 반문하는 게 아니다. 보수적인 공동체주의자들 역시 겉모양은 다르지만 유사한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정의에 대한 설명은 각각의 도덕적 탐구 전통에 자리잡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적 탐구 전통의 숫자만큼 많은 수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MacIntyre 1988). 포스트모던 사상가와 공동체주의자 모두, 충돌하는 정의라는 이 곤경을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조언 역시 충돌할 것이다. 장군들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의 세계도 정의가 서로 경쟁하는 세계다. 우리는 무쇠로 된 절망의 삼단논법에 갇힌 것 같다. 전제 1: 정의의 관념은 특정한 문화와 전통에 달려 있다. 전제 2: 평화는 문화와 전통 사이의 정의에 달려 있다. 결론: 문화 사이의 폭력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가장 유능하고 잘 무장한 장군들이 지지하는 정의, 혹은 가장 효과적인 선전에 의해 내세워지는 정의가 지배할 것이라는 불편한 생각을 용인해야 하는가? 지배자의 정의가 지배적인 정의임을 인정해야 하는가? 평화를 위해 ‘차이’의 억압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평화’라는 이름 아래 폭력의 지배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불의한 정의의 폭력을 벗어나는 길, 정의와 정의가 맞설 때 의로운 판단이 가능한 곳으로 나아갈 길이 존재하는가? --- pp.310-311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진리의 본질과 중요성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며, 둘 중 어느 것도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음이 밝혀졌다. 라이오널 고스먼(Lionel Gossman)이「역사와 문학 사이에서」(Between History and Literature)에서 말했듯이, 근대적인 입장을 취한 우리 선배들의 목표는 “지식을 권력 투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결의 폭력을 무장해제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그것이 “갈등 당사자들이 휘둘러 대는 선언의 공격성을 흩어 버리는 사실적 진리를 세움”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푸코의 예가 보여 주듯이,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입장을 취하는 많은 사람의 목표는 “법률, 의미, 진리라는 관념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의 표현들이나 경쟁하는 힘들 간의 대결을 폭로하는 것”이다(Gossman 1990, p. 323). 나는 근대적 접근법에 반대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사실에 입각한 진리”는 세워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접근법에 반대하며 진리라는 관념의 배후에 존재하는 “권력의 표현들”을 폭로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을 왕좌에 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사실적 진리”도 “권력의 진리”도 공포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면,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 pp.397-398 성경적 전통은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를 보존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중의 하나가 폭력의 사용이다. 많은 고대 문화와 달리, 이스라엘의 정치 신학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왕의 속성이기도 하다는 ‘대표의 모델’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모델에서는, 특별히 정치적인 감정을 예로 들자면, 왕의 분노는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분노는 왕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얀 아스만이 주장했듯이,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분노를 왕에게로 이전함으로써 그것을 세속화하는 대신 왕의 분노를“땅으로부터 하늘로 이전시킴”으로써 그것을‘신학화’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정의의 성취가 왕의 손에 맡겨지지 않고, 역사와 운명이 하나님의 정의의 직접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Assmann 1992a, pp. 98, 105). 신약 성경은 이러한 신적 분노의 신학화 과정을 철저히 고수함으로써 적어도 그리스도인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폭력을 독점하신다는 담대한 주장을 펼친다. 하나님에 의한 폭력의 독점과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든지-로마서 13장과 요한계시록 13장은 이 물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대답을 제시한다-그리스도인은 칼을 들고 백마 탄 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는 안 되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라가야 한다. 베드로전서는“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한다(벧전 2:21, 23; 롬12:18-21 참고). --- pp.479-480 |
정의를 위한 투쟁, 그리고 궁극적 화해에 이르는 길에 대한 신학적 탐구
“내 동족은 짐승처럼 짓밟히고 있었으며,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폭력의 세상 사이에 있는 긴장…이 책은 지적 투쟁의 이야기인 동시에 나의 영적 여정의 기록이기도 하다.”(머리말 에서) 다르다는 것, 이 단순한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을 미워해야 하는 이유로, 때로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민족간 분쟁과 종교간 계급간 갈등이 끊이지 않는 오늘날의 세계는 다른 이(the other)에 대한 배제가 얼마나 근원적인 죄로서 작용하고 있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과연 인류는 폭력과 악과 절망의 뿌리에 자리잡은 정체성(identity)과 타자성(otherness)의 문제를 극복하고 문명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볼프는 드러난 문제의 심층을 보게 하며, 우리 문명의 미숙한 뿌리에 기인하는 이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를 직면하도록 이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나를 중심에 두고 타자를 주변화하며, 타자를 정복하여 통합하려 하거나 배척하며 제거하려고 한다(모더니즘적 기획). 이를 미워한다면, 반대로 우리는 타자와의 연결을 끊고 고립하며 실용주의적인 공존 상태에 머무르고자 할 수도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의 해결책). 하지만 볼프는, 타자와의 관계는 통합이나 단절이 아닌, 우리의 정체성을 재조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정체성과 타자성, 성 정체성, 정의, 진리와 지식, 폭력과 화해의 문제 등, 우리 시대에 화두가 되었던 묵직한 이슈들을 두고 볼프의 지성이 벌이는 엄청난 지적 씨름이다. 때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통찰을 유감 없이 흡수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평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의 사유가 불붙은 장소는 학자의 책상이나 거실의 안락한 소파가 아니라 짓밟힌 동족의 울부짖음이 생생한 억압과 배제의 땅이었기에, 이 땅의 독자들의 가슴에도 그의 메시지가 크게 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