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사랑> 박형진
--- p.154
이 아름다운 시를 읽고 나서 나는 시의 벼랑 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걷다가 어느 틈엔가 시를 잃어버렸습니다. 마음 속에 캄캄한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다시 출간한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벼랑끝>을 찾아 다시 벼랑 끝만 마라보며 걸었습니다.
--- p.52
얼마전에 신경림 선생을 뵌 자리에서 나는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의 시집 제목으로 '농무'를 누가 정한 거죠?'
'그건 창작과 비평사에서 붙였지. 백낙청 선생이 붙인 건지도 모르겠고'
'그러면 이 시집의 대표작을 단 한 편만 꼽으라면 선생님은 '농무'라고 생각하세요?'
'아냐, '농무'는 그저 상징적인 제목으로 의미있는게 아닐까. 나는<파장>같은 시가 오히려 맘에 들어.'
그러면 그렇지! 나도 <파장>이다.
--- p.30
서시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고승이 툭, 한마디 던지고 간 화두 같다. 그러나 깐깐한 오기도 묻어 있다.
--- p.187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듯
한두릅의 굴비 한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것을...
곽재구의-사평역에서- 중
--- p.61
벼 랑 끝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아닌
단풍같은 눈만 한없이 내리고
마음 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벼랑끝만 느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조정권
--- p.51
금강
금강 근처에 살 때에는 강이 낯설어서
강가에 서기가 두려웠다.
강가에 가면 가의 깊이와 만날 수 있을까
강을 찾아 가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기가 여러 번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강을 생각하면
강은 참으로 보고 싶다.
강가에서 멀리 이사를 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하나 얻었다.
그러나 강은 아직도 낯설고 두렵다.
이제 강을 찾아가도 될 때라면
한 번 용기를 내야 하겠다.
두려움은 피할수록 커지는 것
어서 강과 만나 늦은 이유를 말해야 하겠다.
--- p.114
고재종 시인에게서는 요즈음 시가 막 터져나오는 것 같다. 시가 봇둑을 넘어 우리를 적시고도 남아, 참을 수 없이 키득거리게도 한다. 이러한 진경이라면, 시인이 열어 보이는 그 희고 둥근 세계에 나는 죽어도 감전되겠다.
--- p.146
家具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 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 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 발을 툭툭 털어 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려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p.64,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