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많았다. 그래서 김종직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특히 『사서(四書)』에는 왕조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어서 밖에서 노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그런 김종직을 보고 아버지는 학문을 순서대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문을 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에 대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김숙자는 김종직에게 공부의 순서를 가르쳤다. 그리고 글자 한 자, 문장 한 줄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정독하고 공부의 순서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환경이 중요하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여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고사성어를 남겼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대학자인 김숙자를 아버지로 둔 것은 김종직에게 행운이었다.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학문하는 자세를 철저하게 배웠다.
“글씨는 마음의 그림[心畵]이니, 모해(模楷)를 반드시 단정하게 써야 하고, 초서(草書)와 전서(篆書) 또한 단정하게 익혀야 한다.”
김숙자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김종직에게 학문의 순서와 바른 자세를 강조했다. 김종직의 바른 언행은 부친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권력에 아부하는 학문을 경계하라: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영수 점필재 김종직」중에서
이이는 『자경문』을 짓고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공부에 전념했다. 특히 주자학을 깊이 연구했다. 이때 이이는 성혼의 학문에 감탄했다. 23세가 되었을 때 이이는 안동에 가서 퇴계 이황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황은 이 무렵 명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양했다. 그러자 이이가 이황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다.
“어린 임금님이 즉위하시고 시사(時事)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보더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시면 안 됩니다.”
“도리로는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재주도 적어 이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소이다.”
이황이 겸손하게 말했다.
이황과 이이는 서로를 흠모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황은 이이가 돌아가자 월천 조목에게 편지를 보내 이이가 대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이가 명석하여 많이 보고 기억하니 후생(後生)을 두려워할 만하다.” ---「학문은 실천을 위한 것이다: 아홉 번 장원급제의 전설 율곡 이이」중에서
하루는 허봉이 허난설헌에게 말했다.
“초희야, 균이를 원주의 이달 선생에게 보내 시문을 배우게 해야겠다.”
“이달 선생이 누구입니까?”
“삼당 선생으로 불리는 분인데, 원주에 계신다. 우리 집안과 친분이 두텁지.”
“오라버니, 저도 시문을 배우게 해주세요.”
허난설헌이 허봉에게 매달렸다.
“여자가 시문을 배워서 무얼 하느냐?”
“균이를 따라가 배울게요. 오라버니, 제 소원이에요.”
“아버님께 여쭤보자.”
그러자 허엽은 허락하지 않았다.
“계집아이가 어찌 문밖에 나가 글을 배운다는 말이냐?”
그렇지만 허난설헌은 허봉을 졸랐고, 기어이 이달을 찾아가 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허균이 동행하여 남매가 함께 배웠다.---「삶의 무게를 시로 견디어내다: 빼어난 시어로 감동을 준 난설헌 허초희」중에서
홍대용은 연경에서 중국인 학자들도 만났다. 홍대용은 그들과 밤을 새우면서 토론하고, 중국과 서양의 역사, 풍속, 과학까지 공부하고 돌아왔다. 특히 그는 천문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사설 천문대를 만들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집필하기까지 했다. 『주해수용』을 살피면 홍대용이 오늘날의 수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학책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구구단을 조선에 소개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9×9=81, 8×9=72, 7×9=63, 6×9=54, 5×9=45, 4×9=36, 3×9=27, 2×9=18, 1×9=9
九九八十一。八九七十二。七九六十三。六九五十四。五九四十五。四九三十六。三九二十七。二九十八。一九九。
홍대용이 기록한 구구수(九九數)를 살피면 오늘날의 구구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되지 않았을 뿐이다. 홍대용은 구구단을 나열만 하지 않고 응용하는 방법까지 예시했다. ---「큰 의심이 없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다: 조선의 자연과학자 담헌 홍대용」중에서
박지원은 16세가 되었을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박지원은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이보천은 사위인 박지원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16세에 『맹자』를 가르쳤다는 것은 이미 박지원의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렸다. 그의 처남 이재성이 서너 장을 읽으면 겨우 한 장을 읽을 정도였다.
“공은 어찌 책 읽는 춰이 그리 늦소?”
이재성이 박지원에게 물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책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도 한참이나 늦습니다.”
박지원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책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하지 않는가? 문장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연구하고 깨달아 실천해야 한다.’
박지원은 책을 빠르게 읽지도, 외우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책의 내용을 심문하듯이 따지고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히 책 읽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친다: 신문물 도입을 주장한 연암 박지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