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위를 흐르는 빗물 때문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터미날은 아주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의자 위에 앉아 다리를 건들거린던 여자 아이가 피아노 건반을 내리쳤다 [악몽]
--- p.77
어쩌면 명희는 내게서 빌려간 뒤집개를 아예 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드라이버를 남편의 서류 가잡 속에 넣은 것도 명희 짓인지 몰라요. 남편의 서류 가방은 늘 거실 찬장 위에 있으니까요.찻주전자를 태우거나 세탁해 놓은 빨래를 널지 않는 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일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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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우연히 집으로 돌아오는 널 보았다, 넌 생각에 잠겨 줄곧 땅만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이제 보니…… 땅을 바라보고 걷는 것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는 것처럼 그저 좋지 않은 습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오년 만에 전화를 건 고등학교 친구는 애국조회 시간을 기억해냈다. 난 네가 음치인 줄 알았다, 애국가를 엉터리로 불러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들킬까봐 작은 목소리로 한두 번 장난을 한 것이 소설을 쓰게 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내가 콜라와 환타, 사이다를 섞어마신 것조차 어떤 기미로 읽힌 것 같다. 섞어마시면 더욱 맛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뿐인데, 그때는 모두 뜨악하게 쳐다봐놓구선. 아무튼 소설을 쓰면서 나와 관련된 일들이 조금씩 왜곡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 속에는 얼마나 많은 관대함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우연히도 첫창작집을 이맘때 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곧 서른둘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못했다. 2000년이 되면 난 몇살? 초등학교 때 그런 제목으로 작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서른넷이라는 나이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 후면 난 서른네살이 된다. 예전에는 서른을 넘긴 사람들이 모두 어른처럼 보였다. 막상 나 자신이 서른을 넘기고 보니 그들이 저질렀던 실수들이 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적어도 나는 내 또래 사람의 일들까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을 쓰는 동안 봄이 왔고 여름, 가을이 지났고 겨울이 왔다. 그동안 계절을 잊고 지냈다. 덥다 싶으니 여름이었고 추워 겨울코트를 꺼내 입으니 두번째 창작집이 나오게 되었다. 저녁 밥상을 맛있게 차리기 위해 요리책을 뒤적였던 일이 아주 오래 전 기억 같다. 김치를 담그는 건 엄두도 못냈고 시금치나 깻잎단을 다듬어 나물을 무친 게 손꼽을 정도다. 서둘다보니 나물에서 흙이 씹힌 적도 있었다. 소설들 속에 혹시 흙이 섞여 있으면 어쩌나, 지금 심정이 그렇다.
첫창작집 때보다 조금 능청스러워졌다. 그것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 때문에 어머니한테서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소설을 쓸 때만은 명확해지려고 애를 썼다. 소설 한편이 100개들이 귤상자라고 한다면 난 그 속에 99개도 아니고 101개도 아닌 딱 100개의 귤을 채우고 싶었다.
게다리 모양을 한 튀김이 있다. 먹어보니 정말 게맛이었다. 그런데 포장지에 적힌 재료에는 게살이 1퍼센트도 들어 있지 않았다. 포도맛, 베이컨맛, 피자맛, 훈제 통닭구이맛 등등 우리 주위에는 무슨무슨 맛으로 나와 있는 음식들이 아주 많다. 진짜가 아니면서 진짜맛을 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가짜면서 진짜보다 더 맛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
며칠 전 고등학교 후배가 전화를 했다. 언니. 후배는 그렇게 말해놓고 교지에 실을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귤 한봉지와 생크림빵을 사들고 교복을 입은 후배 네 명이 집으로 왔다. 십칠년 전 우리 학급의 담임선생님은 졸업앨범 속의 내 사진을 보고 아하, 이 학생, 하고 웃으셨단다. 성실하고 공부 잘했던 학생으로 선생님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숨겨주지는 않는다. 그러니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내뱉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글은 더더욱. 내 인터뷰는 은행 지점장이 된 선배의 인터뷰와 나란히 실리게 될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소설이 나를 썼다”는 헤밍웨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더디기는 하지만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왔다. 그 말을 하신 어머니께 이 책을 드리고 싶다. 그분을 반만이라도 닮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전히 부족한 글을 책으로 묶어주신 창작과비평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김성은씨는 내가 놓친 흙을 골라내어 글이 깨끗하게 놓이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이 책을 펼치는 여러분께도 감사를 전한다. 내 본심과는 달리 내 소설들은 여러분의 뒤통수를 치고 싶어한다.
1999년 마지막달에
하 성 란
밤이면 깊은 잠을 잘수가 없었어요.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가스 콕을 잠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엌으로 몇번이나 왔다 갔다 했죠.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남편이 신경질을 부렸어요. 가스 콕을 확인하고 나서 자리에 누우면 이번에는 현관문을 잠갔는지 의심이 가는 거예요. 일어나서 가보면 현관문을 잠겨 있습니다.
밤잠을 설치게 되니 자연히 낮에 졸음이 쏟아졌어요. 아이는 명희와 같이 지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가끔 잠 속으로 명희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 p.23
미국은 마세루. 오스트리아는 워싱턴. 일본은 쿄오또........ 내 기억력은 아직 쓸만합니다.막힘이 없이 줄줄 외웁니다. 명희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피싯 웃은것도 같습니다. 명희가 왜 나를 향해 어렇게 웃는거죠? 어쩌면 명희는 내게서 빌려간 뒤집개를 아예 돌려주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드라이버를 남편의 서류가방 속에 넣은 것도 명희 짓인지 몰라요 남편의 서류가방은 늘 거실 찬장위에 있으니까요.
찻주전자를 태우거나 세탁해 놓은 빨래를 널지 않은건 누구에게나 있을수있는 사소한 일일지도 몰라요 우리집 열쇠도 명희가 숨겼는지 모릅니다. 명희가 내세서 빌려간 것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떠올려봅니다. 세계 각국의 수도를 외우는 훈현이 내게 큰 효과가 있는것 같습니다. 뒤집개, 드라이버, 병따개, 우산, 열쇠, 마늘다지기,...그리고. 명희의 남편, 그리고 내 아들 성환이는 마치 한가족처럼 보입니다. 남편과 내 아이, 다른 물건들처럼 이번에도 돌려주지 않을 작정일까요? 명희, 저 낯선 여자가 누굽니까? 507호 옆집 여잡니다.
--- p.36
명희가 쇼핑 카드를 들고 내게로 옵니다. 명희의 손을 잡은 아이의 한 손에는 장난감이 든 과자가 들려 있네요. 이제 만원따리 쿠폰 하나만 더 받으면 롤러 블레이드와 바꿀수 있습니다. 롤러 블레이드 이야기를 꺼내자마다 아이가 신이나 겅둥거립니다. 돈1을 지불하고 만원짜리 쿠폰까지 챙겨습니다. 가게문을 나서려는데 별안간 여주인이 내 앞을 가로막았어요. 쇼핑백 안에 든 물건 좀 보여 주실래요? 그제서야 철수세미를 가슴속에 넣어둔 채 진열대에 되돌려놓는 걸 잎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맹세코 철수세미를 훔치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 pp.33-34
남편이 왔습니다. 밖에서 보니 남편은 참 말쑥합니다. 아침에 다려준 와이셔츠에는 벌써 구김이 졌어요. 남편이 내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댑니다. 영미야 영미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말해, 영미야. 왜 이렇게 이 남자가 내 이름을 불러대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내가 내 이름마저도 잊어버린 걸로 생각하는 건 아닐 테죠. 명희가 눈물을 흘립니다. 언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다 내 잘못이에요. 남편이 영희를 다독거립니다. 남편은 아예 날 바라보지도 않아요. 부끄럽겠죠. 아마 내가 전혀 모르는 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남편은 그전의 남편이 아닙니다. 희망쇼핑에서 쇼핑을 하던 사람들이 남편과 나, 명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지나칩니다.
---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