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하는 건가?”
“네가 변하지 않았다는 게,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니,. 아니, 젊었을 때의 네가 나이만 먹은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넌 날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하잖냐. 넌 좀, 그래, 젊었을 때부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는 건가? 몇십 년 만에 갑자기 찾아와서, 이렇게 무례한 일을 벌이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말했잖냐, 단순하게, 가슴이, 감정이 있었던 자리를 보여주려고 한다고, 있던 게 없어졌을 때 알게 되는 그 존재감 말이야, 젊은 날 한때 우리가 심취했었던 철학이잖아. 그때 알던 것들은 알던 게 아니어다는 말이지. 이렇게 늦은 나이에 그런 게 명징해질지는 몰랐다. 널 보러 온 이유도 간단해, 네가 정말 존재했었는지, 확인하러 온 거란 말이지.” --- pp.36-37
시간이 어떻게 지나고 얼마나 지나갔는지 그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를 찾는 사람도 없었고, 그가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는 때로 간절하게 누구라도 그리워하고 싶었는데,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
는 한밤중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자기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리움이라고 단정했다. 곰곰 하나하나 떠오르는 사람을 되새겨보았다. 그리움과는 먼 사람들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속으로 억지를 썼다. 그래도 잠깐 머릿속에 떠오른 그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좀 좋아졌다.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세, 자기가 왜 이러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는 다시 침울해졌다.
침울한, 우울의 나날에 빠져 있는 어느 하루, 갑자기 벨이 울리고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 누군가 자신을 찾는 벨 소리가 환청 같았다. 문 앞에 공민지가 서 있었다. --- pp.207-208
공민지에게 욕정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공민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와도 관련 없는 일이었다. 다만, 자신이 어느 순간에도 늙고 있고, 몸이나 외형적인 것 말고 마음이, 내면이, 찰나에 늙어버리고 약해지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과정을 스스로 보고 있었다. 욕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흥분한 것은 성욕이 아니었다. 그가 평생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성욕이나 성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제는 소멸되고 사라진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다. 짧은 시간,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그게 씁쓸하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p.209-210
산 정상 근처에 오르자 하늘이 더욱 높아졌다. 숨이 가빴고,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녀는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숨을 골랐다. 굽이굽이 산능선을 바라보았다. 수련원 황토집에 들어온 지 꽤 됐지만, 산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멋진 줄 알았으면 자주 좀 올라올 것을.” 그녀가 숨을 고르며 혼잣말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마치 떠나온 길을 돌아다보듯, 뒤돌아보았을 때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의사가 말한 대로 땅 끝에서 바다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 이뻐라.”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바다는 하늘색과 닮아 있었다.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희미한 경계를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이 부서져 내려, 그녀는 눈물을 조금 흘려보냈다.
--- pp.223-224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태복음」 6장 21?23절)
소설가가 꿈이었던 시절, 소설가가 되면 ‘무엇을 쓸 것인가’ 고민하던 시절, 했었던 다짐, ‘마음이 가난’하고 ‘낮은 자’를 위하여! 허나, 나는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아적도 모르고, 선뜻, 낮은 자의 편에 서는 것도 주저한다. 원대했던 꿈에 대해 반성 중,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젊은 작가 백가흠이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노년의 드라마 앞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비틀거리는 노년이란 그가 예측하는 자신의 잔인한 미래인 것일까? 그러나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이름을 물어보며 이쪽 문 저쪽 문을 열고 닫는 사람은 백용현만이 아니다. 젊은 공민지도 과거의 무게 전체를 짊어지고 자신을 인식하기보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재현하려는 공허한 시도를 반복한다. 노년이건 청년이건 분해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는 결여를 채우는 것 이외의 다른 삶이 방향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삶은 누구에게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백가흠은 거미줄을 사방으로 펼치는 거미처럼 늙음과 젊음을 같은 밀도로 배치한다. 다 같이 불안한 무 속에서 존재의 빛을 기다리고 있는 노년과 청년의 방황을 통해서 심리의 드라마를 도덕의 드라마로 변형한다. - 김인환(문학평론가)
--- 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