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어스를 켠다. 검은 배경에 푸른 얼룩이 진 구가 빙글빙글 돈다. 지난 필드 트립에서 저장한 마지막 아이콘을 클릭한다. 시점은 빠른 속도로 구름 형상의 픽셀들을 뚫고 내려간다. 물방울을 튀기지 않고 매끈하게 수면 아래로 잠기는 솜씨 좋은 다이빙 선수처럼. 잠시 기다리자 흐릿하던 픽셀들이 차례로 또렷해진다. 세계는 이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 p.26, 이민지 [필드:트립, 세션들]
“바이러스라고 했던가요?”
“네, 바이러스로 사회가 무너졌고 사회가 무너져서 기반 시설 관리가 안 되어버렸죠. 지금 이 순간에도 위험 폐기물들이 지하에서 줄줄 새고 있어요…”
“그런 것치고 생존 종이 적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종 다양성이 굉장했던 곳이라 들었는데 최대한 한번 모아봅시다.”
수석 채집가가 말을 끝마치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감각을 자랑하며 움직이는 것을 향해 그물망을 쏘았다. 아까 것보다 조금 더 큰 털 짐승이 걸려들었다. 사나운 소리를 냈기 때문에 두 채집가가 물러섰다. 손바닥만 한 동물은 꼬리가 길고 얼룩덜룩했다.
--- p.98, 정세랑 [채집 기간]
분명히 아는 공간들인데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그 이질감이 좋았습니다. 어긋남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진이 시간과 공간의 매듭으로 태어나는구나,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 p.107, 정세랑 인터뷰ㅤ
사람들의 우주선이 도착하기 전의 세상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면 누구든 죽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미우면 때릴 수 있었고, 몇 대 때려서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도 눈에 보이는 다른 거인을 물어뜯어 씹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즐겁고 상쾌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게 얼마나 후련한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힘이 세고 실력이 뛰어난 거인이 다른 거인을 죽여 없애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거인을 죽여 없앨 때, 죽어 가는 상대방을 보면서 이겼다는 성취감과 통쾌한 기분을 느낄 때, 우리 거인은 거인답게 잘 살 수 있었습니다.
--- p.115, 곽재식 [이상한 거인 이야기]
내가 스파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지만 큰 소리로 할 말은 없는 사람. 얼굴을 마주보며 한참을 속삭이다 주위가 시끄러워져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냥 말을 멈춰버리는 사이. 그래도 우리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표정이나 눈짓으로 말을 이어가다가 그마저도 피곤해지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시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스파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런 우리 사이에도 작은 비밀이 생겨났다. 그리고 물어서는 안 되는 영역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하지만 둘 사이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다 스피커 바로 아래 테이블에 자리 잡은 날처럼 말로 하는 대화가 줄었을 뿐이었다. 적어도 스피커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129, 배명훈 [소곤거리던 사이]
비어있다는 것, 그리고 채워져 있다는 것에 대해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진에 지배되지는 말아야겠다 싶었고요. 디스토피아 느낌의 사진이어서 창작자의 본능에 따라 주어진 과제에 결을 맞춰버리면 디스토피아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왠지 함정에 빠지는 것만 같아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기획이라고 느꼈거든요. 세계를 망가뜨리지는 말아야지, 그러면서도 상실과 빈 공간을 담아내야지, 그런 고민의 결과가 소설의 방향을 결정지었다고 생각합니다.
--- p.139, 배명훈 인터뷰
이곳에는 이제 S와 같이 지나온 날들의 윤곽은 희미해지고 앞으로 남은 날들에 대한 기대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영원한 겨울이 장악하는 도시에서는 사람의 몸이 위축되고 정신도 축소된다. 아무 길섶에나 무방비로 몸을 부려놓으면 틀림없이 동사하기에, 이곳을 살면서는 상시 깨어 있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외부로 확장되지 않고 자신의 질량을 보존하는 에너지가 다만 침체와 냉소를 견지한 채 멈춰버린 것이다. S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곳 아닌 다른 어딘가로 뻗어나 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그려본 적 없다.
--- p.147, 구병모 [시간의 벽감(壁龕)]
소설의 주요 모티프가 된 이미지를 꼽는다면, 거리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주황색의 커다란 상자같이 생긴 공중전화부터 보며 자란 사람이어서, 그보다 옛날에는 이런 보통의 가정집 전화기처럼 생긴 것이 공중전화로 쓰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직접 동전 투입이 아니라 아마 옆 가게 주인에게 요금을 내고 쓰는 방식이었을 것 같은데, 방법적인 문제보다도 그녀가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지 신호는 잘 가서 닿았는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 p.155, 구병모 인터뷰
이미지들의 발전 속도는 상상 가능성보다 낮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지식과 경험의 한계 속에 갇히기 마련이다. 아무리 SF와 판타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자유로운 비상을 즐기는 것 같더라도 우리에게 진정한 새로움의 경이를 안겨주는 것은 과학이다. 우리는 겸허하게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 p.247, 듀나 [이미지들의 발전 속도는 상상 가능성보다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