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건축물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특히 종교 건축물은, 현실을 벗어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규모의 건축물 앞에서, 난 속절없이 힘없는 인간임을 고백하고야 만다. (중략) 한낮의 햇빛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다고바의 순결한 표면이 더욱 하얗게 느껴진다.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이곳을 떠나기가 망설여진다. 강렬한 시각적 끌림에 발걸음은 움직이길 주저한다. 건축적 장치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조장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늦은 오후 다고바 뒤로 태양이 숨었다. 다고바는 마치 후광을 뿜어내는 자태를 연출한다. 그리고 드디어 노을이 깔리면서 다고바는 또 다른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다고바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스리랑카에는 사자가 살지 않는다. 그러나 스리랑카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자의 후예라고 믿는다. 어쩌면 용맹하고자 했던 열망이 이러한 믿음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덩치도 크고 멋진 상아를 가진 코끼리도 많은데, 왜 하필 스리랑카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엔 살지도 않은 사자를 숭배의 대상으로 선택했을까? 믿음은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도록, 아무런 뒷받침을 만들어 놓지 않는다. ‘전 못 믿겠어요’라고 말하면, ‘넌 믿음이 부족하구나’라고 비난받는다. 당최 이 믿지도 못할 상황에서도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을,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다.
콜롬보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에어컨이 달린 버스가 없다는 말에 성큼 일반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승객들도 가방만 좌석에 던져두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버스의 출발 시간은 얼마나 많은 손님이 버스에 탔느냐에 달렸다. 그날도 꽤나 기다린 후에야 시동이 걸렸다. 운전기사는 여지없이 난폭운전을 한다. 선반 위에 올려놓은 짐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길 반복한다. 잠을 자던 승객 한명이 떨어지는 배낭에 머리를 맞았다. 가방을 보니 꽤나 큰 여행 가방이다. 충격일 컸을 텐데도 별다른 기색 없이 다시 잠에 빠진다. 스리랑카에선 늘 있는 버스 안 풍경이다.
폴로나루와에는 아름다운 조각상, 그리고 불교사원과 힌두사원은 많지만, 인간을 위한 주거의 공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인간을 위한 장소보다는 신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자 한 그들의 바람과 열정이 느껴진다. 아누라다푸라가 웅장하고 단순한 아름다운을 가진 다고바를 위한 장소였다면, 이곳은 섬세하게 조각된 불상을 위한 장소다. 현 세상에 살지도 않는 초현실적인 존재인 신들을 위해, 왜 인간들은 그렇게 신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날이 밝아오자, 예약해 두었던 차를 타고 세상의 끝(World’s End)이 있다는 호튼 플레인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해발 2,300m에 달하는 고산평원에는 다양한 풍토식물과 동물들이 살고 있다. 약 한 시간이 못되게 달려 도착한 공원 매표소 앞에서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이 뜻밖의 장소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을 보고 말았다. 화장실 칸의 한쪽 벽은 완전히, 그야말로 뻥 뚫려 있었다.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누가 화장실 변기 앞에서 대자연을 조망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멋지다. 높은 곳에서, 저 멀리 초원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배설을 하는 행위는, 이제까지의 화장실에 대한 패러다임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항상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부끄러이 일을 보다가, 이렇게 확 트인 자연 앞에 당당히 바지를 내리고 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까지 경험해본 가장 상쾌한 화장실이었다.
공간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자극적이지 않다. 호텔은 주변 환경에 유난스레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겸손함은 자연스레 주변 바닷가와 야외수영장, 그리고 넓은 마당에 촘촘히 자라는 코코넛 나무와 어울린다. 사람들은 건물을 즐기러 온 게 아님을 바와는 잘 알고 있다.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을 뽐내기보다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건축을 선택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