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에서 군대와 무기만큼이나 중요한 수단은 정보였다. 미소 양국은 이질적 지역들을 하나의 진영으로 묶어두고 장벽 너머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선전과 첩보를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특히 미국 정부는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고 우호적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고, 한국전쟁 이후 전 세계에 ‘미국의 정의’를 전파하기 위해 미국해외공보처(USIA)라는 방대한 조직을 구축했다.”
---p.13, '여는 글' 중에서
“역사적으로 이차세계대전은 영화의 이용가치가 극대화된 전쟁이었다. 기술적으로 무성에서 토키로, 흑백에서 컬러로 나날이 진보했던 영화라는 뉴미디어는 라디오나 신문 같은 올드미디어보다 광범위하고 강력한 전파력을 증명했다. 항공정찰과 공중폭격에도 영화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영화는 사상전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근대 전쟁에 필요불가결한 무기가 되었다.”
--- p.25, '제1장 전시정보국의 극동 지역 공보선전' 중에서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주둔한 미군이 가장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는 미디어 장악이었다. 15일에 서울중앙방송국(전 경성중앙방송국, JODK)을 비롯해 38도선 이남의 지방 방송국 10곳(부산, 이리, 대구, 광주, 목포, 마산, 대전, 춘천, 청주 방송국 및 강릉 이동방송중계소)을 접수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를 9월 25일에, 『매일신보』를 10월 2일에 접수했다. 이어서 미군은 12월 6일에 발령한 미군정 법령 제33호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에 근거해 38도선 이남의 극장을 접수했다.”
--- pp.36~37, '제1장 전시정보국의 극동 지역 공보선전' 중에서
“영화인들이 해방에 품은 기대는 금방 사그라졌다. 제작 상황은 30년 전으로 후퇴한 것 같았다. 영화 기근을 버텨내기 위해 때 아닌 ‘키노드라마 운동’이 펼쳐졌고, [검사와 여선생](1948)처럼 무성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청춘의 십자로](1934), [심청](1937), [신개지](1942) 등 흘러간 시절의 필름이 창고 밖에서 나와 국산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갈증을 더욱 부추기는 사이, 무려 일제 말기에 제작된 국책 선전영화까지 상영되어 물의를 빚었다.”
--- p.55, '제2장 주한미공보국의 영화공작' 중에서
“해외 공보선전을 뒷받침했던 스미스-문트 법에는 미국이 해외에 제공하는 정보를 미국 국내에 유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국내와 해외라는 이중 잣대로 공보선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해외에 유포한 이른바 ‘미국의 진실’이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이 조항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미국인들은 미국해외공보처(USIA) 영화나 주한미공보원 영화를 원래의 형태대로는 볼 수 없었다.”
--- p.92, '제3장 주한미공보원의 설립과 문화냉전의 서' 중에서
“한국에서 주한미공보원이 문화냉전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대표적 미디어는 미국문화연구소(USIS 지부)였다. 9대 도시에 설치된 미국문화연구소는 그 도시뿐만 아니라 도(道) 전체의 공보 책임을 맡았다. 미국문화연구소는 1만에서 2만에 이르는 주소록을 작성해 출판물을 우송하는 한편, 시민 일반에 출판물을 배포해 미국과 미국의 이념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미국문화연구소는 반공 선전보다는 한국인이 미국과 민주주의에 우호적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극장 외에 이렇다 할 근대적 문화시설이 없었던 한국에서 미국문화연구소에 대한 한국인의 호응은 뜨거웠다. 각 지방의 미국문화연구소는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구하기 힘든 장서를 갖추고 대출까지 했으며 각종 전시회와 음악회, 전람회, 영화 상영회를 주최했고 영어 강좌와 문화 강좌를 운영했다. 미국문화연구소는 이처럼 정보 창구인 동시에 문화기관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미국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었다”
--- pp.94~95, '제3장 주한미공보원의 설립과 문화냉전의 서' 중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석 달 동안 남한에는 19개국으로부터 300여 명의 외신기자가 파견되었다.30 조기 승전할 것 같았던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장기화되면서 취재열은 더욱 고조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 점령지였으나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 바로 안과 밖에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진 것을 목격했고, 이웃나라의 전쟁에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되어 전쟁 특수를 맞이한 일본의 취재열은 특기할 만하다.”
--- pp.129~130, '제4장 한국전쟁기 주한미공보원의 영화공작
“미군은 심리전만이 아니라 포로 교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도 전쟁 포로 영화를 제작했다. 미군이 포로 교육에서 중점을 둔 것은 ‘긍정적 접근’이었고 전쟁 포로 영화 역시 신뢰감을 높이기 위해 포로가 스스로 반공 진영의 우월성을 증언하는 인터뷰가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 협상이 진행될수록 전향의 시각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영화 촬영에 대한 포로들의 반감은 높아갔다. 1953년 4월 15일, 중공군 포로 700명이 영화 촬영을 거부하며 농성을 벌인 예에서처럼 전쟁 포로 영화는 오히려 심리전 목표에 역행하는 사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 p.150, '제4장 한국전쟁기 주한미공보원의 영화공작' 중에서
“이화여전 영문학과 출신의 모윤숙은 해방 전에는 친일 작가였고 해방 후에는 우익 문단에서 활동했다. 친미·반공주의를 명확히 드러내면서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감상적 시를 많이 남겼다. 그녀는 미군정기에 모교 출신 중 영어가 가능한 여성들을 모아 낙랑클럽을 만들고 점령군의 유력 인사들을 초청해 호화로운 댄스파티를 열었는데 사교의 장은 곧 로비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이승만으로부터 은밀히 지원을 받은 모윤숙은 낙랑클럽의 인맥을 기반으로 정보 수집과 로비 활동을 병행했다.”
--- pp.178~179, '제5장 미국해외공보처의 탄생과 상남 시대의 개막' 중에서
“원자력의 평화 이용 캠페인의 성패는 오로지 핵에 대한 공포를 발전(發電이자 發展)에 대한 희망으로 전환하는 데 달려 있었다. 즉, 전 세계인이 핵전쟁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핵을 욕망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이 캠페인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원자력을 둘러싼 미국의 ‘욕망 교육(education of desire)’은 특히 스스로 원자력 발전 기술을 갖출 가능성이 낮은 제3세계 개도국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 p.202, '제6장 냉전의 과학과 주한미공보원의 과학영화' 중에서
“아폴로 붐에는 한국 정부의 전폭적 협력이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발사 준비가 한창이던 시기 박 정권은 삼선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삼선 개헌 저지를 위한 호헌 투쟁이 야당인 신민당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6월 12일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경기대학교, 경북대학교 등 전국 20여 개 대학에서 연일 개헌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장기 집권을 목표로 한 개헌에 반대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신민당은 7월 17일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열고 19일 효창운동장에서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 그날 연사 중 한 명이었던 함석헌은 정권과 여당뿐만 아니라 권력에 휘둘려 학생 데모는 제대로 보도도 못하면서 아폴로 발사만 대서특필한 신문도 함께 규탄했다. 그날 문공부 장관은 “우주의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그날을 경축하고 달 세계 개척에의 전 인류 참여에 호응하고자” 한국 시간으로 달 착륙이 시도되는 2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 p.223, '제6장 냉전의 과학과 주한미공보원의 과학영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