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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통을 기다리며
고향에 남은 자취 세상 속으로 백성과 나라 여향(餘響) 사람이 하늘이다 옛날 옛적에 작가의 말 |
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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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눕다가 잠이 깼다. 가까운 곳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잠이 깼는지도 모른다. 밥 해줄게 부헝, 떡 해줄게 부헝, 울지 마라 부헝, 가지 마라 부헝. 옆자리에서 엄마는 가끔 입맛을 다시며 열심히 자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돌아누웠는데 어느 결에 눈가를 흘러내린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저놈의 부엉이 멀리 쫓아버려야 해. 나는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그믐이라 마당도 안 보일 만큼 캄캄했고 바로 옆에서 나직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쟁이에 속곳 차림에 맨발인 나는 으쓱해서 얼른 들어간다는 게 건넌방 미닫이문을 살짝 열고 들어섰다. 그러고는 주춤 섰는데 코 골던 소리가 갑자기 그쳤고 내 숨도 멎었다. 어둠 속에서 손이 쑥 솟아 올라 내 발목을 잡았고 두 팔로 나를 주저앉혀서는 이불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어느 결에 그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 p.32
신통이 녀석 언젠가부터 우리네와 좀처럼 안 어울린다네. 하는 것이 그의 첫마디였다. 박돌은 이신통을 십 년 전에 처음 만났다고 그랬다. 천안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울고 웃고 성나고 기쁘게 하기를 하늘이 여름날의 바람과 구름을 희롱하는 듯하였다. 옛말에 이야기 주머니라고 하더니 바로 신통이 그러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간절한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그치니 사람들은 뒷얘기가 너무 궁금하여 다투어 돈을 그의 발아래 내던졌다. 이신통은 당시에 한양 패거리와 헤어진 직후여서 단출한 패거리를 이끌고 다니던 박돌이 막걸리 잔이나 사면서 동무가 되었다. 신통은 다시 때와 장소를 구분하여 이를테면 장터 어구의 버드나무 아래라든가 다리 앞에라든가에서 다른 이야기로 판을 벌였다. 새 손님이 많았지만 앞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도 지나가다 다시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박돌이 자기네 패와 동행하기를 권하여 함께 다니다가 이신통과 헤어졌는데 그들은 다시 도방 대처에서 만나기를 거듭했고 나중에는 신통이가 광대물주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전주에서 엄마의 색주가에 들렀을 때에 이신통은 광대물주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그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내가 글쎄 그 일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박독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지도라구 들어봤나? 신통이가 그 패거리에 들게 되었거든. --- pp.63-65 박돌이 이신통에 대한 불길한 소식을 남기고 떠난 뒤에 나는 뜸을 들였다가 어느 날 영업이 끝나고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하던 때에 슬며시 묻게 되었다. 엄마, 천지도가 뭔지 알우?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더니, 뜬금없이 천지도는 왜...... 한번 믿어볼라구? 관에서 금한다며? 양반 것들이 저희 자리 내노랄까 봐 노심초사하는 게지. 천지도에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다 그런다는구나. 그 말본새 하난 마음에 들더만. 나두 주문 외우는 소린 여러 번 들었다. 우리 집에 묵어가는 길손들 중에 겉으로 말은 안 해두 내가 대강 눈치를 채는데 하나둘이 아녀. 천지도인들 점잖은 사람들이더라. 소문에 듣자 허니 촌에는 동네마다 모여서 기도하구 그런다대. 하면 엄마는 왜 안 믿었어? 봄꽃두 먼저 피면 반갑고 이쁘기는 하더라만 그것이 천기를 보는 거여. 꽃샘바람 불고 눈보라 치면 속절없이 지는 법이니라. 세상이 만화방창할 제 더불어 피어나야 절기를 누리는 거란다. 그러면 어여쁜 본색을 어찌 드러낼 수 있남? 글쎄, 남이 한다고 성급히 따라 할 것이 아니다. 작은 복을 제 복이려니 하고 살아야지, 언제 하늘 복까지 바라겠냐. 나는 어쩐지 엄마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산전수전 다 겪어온 우리 모녀의 지혜이기도 하고, 열없는 쓸쓸함이기도 하리라. --- pp.65-66 엄마를 인근 산에다 묻고 돌아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우리 모녀가 함께 살던 세월이 수십 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인 홀몸이며 더 이상 누구의 딸이 아님을 절실한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아, 내 아기가 먼저 가지 않고 곁에 있었더라면. 문득 이신통이가 나의 전생 아들인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나자, 애틋하고 속상하던 것은 겨울 굴뚝의 저녁 짓는 연기가 북풍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듯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대신 그를 보듬어 쉬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어 필사본 책을 들었으나 읽어나가는 중에 점점 빠져들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가 아니며 홀몸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내가 바로 하늘님이라니! --- p.367 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 p.467 |
이신통을 기다리며
“내 이름은 연옥이고 다리목 객주의 주인이다.” (박연옥) 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로 태어난 박연옥은 나이 열여섯에 삼례에 사는 시골 부자의 후처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연옥의 마음속에는 어머니 밑에서 주점 일을 거들다가 알게 된 이야기꾼 이신통이 정인으로 자리잡아 있다. 시집을 가서도 남편이 투전판을 드나들며 집안을 돌보지 않자 연옥은 삼 년 만에 파경을 선언하고 충청도 강경의 친정으로 돌아온다. 연옥은 민란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하고 돌아온 신통을 다시 만나 그를 간호하며 짧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그것도 잠시, 나라에서 금지한 종교 천지도의 신자인 신통은 나라의 천지도 탄압과 각지의 민란을 모른 척할 수 없다며 연옥의 곁을 떠난다. 고향에 남은 자취 “신통은 언약하고 갔건만 그해 세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박연옥) 이신통이 떠나고 한 달 뒤, 연옥은 자신이 아이를 가졌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는 사산된다. 우연히 이신통의 소식을 들은 이후 연옥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그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한다. 강경에서 무주, 금산, 옥천 그리고 이신통의 고향집이 있는 보은까지 이르는 열흘간의 여행길에서 연옥은 이신통의 과거 지인과 가족, 전처, 딸 등을 만나고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신통 그가 어떻게 태어나 자랐고 어떤 계기로 집을 떠나 천지도에 입도하게 되었는지를 대략적이나마 알게 된다. 세상 속으로 “저는 서얼(庶孼)입니다.” (이신통) 이신통의 본명은 이신으로 양반집 서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이지언 밑에서 이복형 이준과 차별받지 않고 자랐다. 그러나 이신통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형과 그의 어머니 유씨 부인으로 인해 좀처럼 고향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과거를 핑계로 한양으로 떠나면서 실질적으로 집안과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한양에서 이신통은 담배 장수 서일수를 만나 친해지고 그와 어울리는 와중에 전기수(이야기꾼)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백성과 나라 “내가 기왕에 세상의 경난을 배우려고 집을 떠났으니 어찌 일 년도 못 되어 돌아가겠느냐?” (이신통) 알고 보니 서일수는 천지도 교인으로 사문난적의 죄로 투옥된 동료 박도희의 구명을 위해 한양으로 온 것이었다. 이신통과 서일수는 그해 식년시에서 거벽 사수 일을 하다 알게 된 병장 김만복을 통해 감옥에 갖힌 박도희의 감형을 꾀한다. 천지도 본부에서 박도희 구명에 필요한 비용과 『천지도경』, 『천지인가』의 방각본 제작비를 위해 보내온 천종급 산삼을 처분하는 일을 하면서 이신통은 처음으로 천지도와 연을 맺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반란죄로 김만복이 처형당하자 이신통과 서일수는 그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일단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여향(餘響) “만나게 되면 내 말이나 좀 전해주세요. 이제는 여향을 찾았냐구요.” (심백화) 이신통의 성장과정은 알게 되었으나 막상 지금 그가 어디에 머무는지를 알지 못한 채 나날을 보내던 연옥에게 광대물주 박돌을 통해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이신통과 같이 소리패에서 어울려다니며 한때 연을 맺은 다른 여인이 지금은 전라도 부안에서 유명한 여자 명창이 되어 산다는 것이다. 연옥은 이신통의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부안으로 그 여인을 찾아간다. 여인의 이름은 심백화. 그녀는 연옥에게 담담한 어조로 이신통이 한양에서 서일수와 헤어지고 어떻게 지내다가 광대물주 박삼쇠를 만나고 그들 소리패와 어울려 전국을 유랑했는지, 자신과 어떤 시기를 거쳤다가 헤어지게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사람이 하늘이다 “혹시 누가 알까, 그이가 끊어진 실의 끄트머리를 잡고 내가 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게 될지.” (박연옥) 연옥은 호열자 때문에 어머니를 잃게 된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 연옥은 지난번 백화가 헤어질 때 건네준 이신통의 언문필사본 『천지도경풀이』를 되풀이해 읽으며 천지도의 사상을 배워간다. 예전에 이신통이 한양에 머무르던 시절에 서일수와 같이 옥바라지를 해주었던 천지도인 박씨 형제의 근황을 들은 연옥은 다시 한 번 이신통을 찾기 위해 예산에 사는 형 박인희와 강원도에 은거하는 동생 박도희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그들과의 만남을 겪으면서, 연옥은 박인희에게는 천지도 사상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얻고, 박도희에게는 갑오동학 이후 신통이 천지도 본부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듣게 된다. 그리고 오랜 여정 끝에 둘은 재회하고, 이틀 동안 짧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옛날 옛적에 “여울물 소리는 속삭이고 이야기하며 울고 흐느끼다 또는 외치고 깔깔대고 자지러졌다가 다시 어디선가는 나직하게 노래하면서 흐르고 또 흘러갔다.” (박연옥) 이신통을 만나고 온 후 연옥은 아이를 가졌다. 이번에는 무사히 낳았고 그에게 연옥은 노성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를 키우며 순식간에 다섯 해가 지나갔을 무렵, 이신통의 근황을 알고 있을 법한 마지막 사람인 박도희를 연옥은 찾아간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이신통이 어떻게 천지도 탄압에 앞장선 이복형 이준을 처단했는지 듣는다. 다시 두 해가 지나 보은 이신통의 고향집에서 연옥에게 기별이 도착했다. 이신통이 활빈당에 들어가 지낸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에는 이신통 처남 송우경이 직접 그곳으로 가지만, 열흘 만에 돌아온 그가 가져온 소식은 이신통이 묻힌 묫자리 위치였다. 연옥은 그곳으로 가서 직접 이신통의 유골을 수습한다. 보은으로 출발하기 전날 밤, 이신통의 마지막을 돌봐준 늙은 뱃사공 집에서 하루 묵으며 연옥은 밤새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울물 소리에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한다. |
“내 마음 정한 곳은 당신뿐이니, 세상 끝에 가더라도 돌아올 거요”
여인의 입을 통해 모자이크 벽화처럼 드러나는 구한말 신통방통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 『여울물 소리』는 19세기 격동의 시대를 담아낸 작품으로, 그 주제의식과 소재 등은 대하소설을 써도 충분할 만큼 방대하다. 이런 방대한 작업을 단 한 권으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진정한 압축의 미를 보여준다. 그만큼 밀도 있고 탄탄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동학, 전기수, 강담사, 작자 미상의 수많은 방각본 소설, 타령 등 다양한 소재들은 소설 곳곳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하며 독자들에게 독서의 재미를 선사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화자 ‘박연옥’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로 태어난 연옥은 이신통에 대한 연정을 한평생 마음속에 품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리워하며 인내하는 우리네 전통적인 여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직접 그의 행적을 따라 길을 나설 정도로 당찬 면모를 보여준다. 소설은 연옥의 입을 통해 모자이크 벽화처럼 이신통의 행적이 드러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신통은 물론 주변인들의 태생, 성격과 이들이 겪은 일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뚫고 있는 연옥은 사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 근접한 1인칭 관찰자이다. 나는 추석이 지나자마자 길을 떠날 작정을 했다. 건어물과 소금 지게를 지고 열두 고개 넘어 산간 마을을 다녀온 장돌뱅이 안 서방이 그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식이랬자 별로 시원한 내용은 아니었다. 안 서방이 들었다는 소문은 그 웬수가 덕유산 자락 어딘가에 자리를 틀고 앉아 도를 닦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위인이 한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다는 소리도 어딘가 걸맞지 않건마는 더구나 도를 닦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니, 도라면 재작년 그러께 온 세상을 들었다 놓고 도처에서 피박살이 나버린 ‘천지도’란 요물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겐가. 애고, 복도 없고 가련한 이내 팔자. 연옥이 찾아다니는 이신통은 서얼의 서자로 태어나 몰락한 지식인으로서 주변부를 떠돌며 전기수, 강담사, 재담꾼, 광대물주, 연희 대본가, 그리고 나중에는 천지도에 입도하여 혁명에 참가하고 스승의 사상과 행적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글을 읽는 솜씨가 신통방통하다 하여, 본명 ‘이신’이라는 이름보다 ‘이신통’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이 인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 19세기 말 격변의 시대에 엄격한 신분 제도로서 유지되던 유교적 사상을 뒤엎고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놀랄 만한 선언을 했던 동학(소설 안에서는 ‘천지도’라고 지칭한다)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을 스케치하면서 고통과 상처투성이의 근대를 거대한 서사 안에 녹인다. 천지도라…… 자네도 도인인가? 신통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저도 도인입니다. 저희는 서교와는 달리 조선 백성을 위하여 척양척왜하고 만백성이 상생하는 나라를 이루는 것이 오직 소망이올시다. 일세 교주께서 사문난적의 오명을 쓰고 처형된 이후 신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방 각처에서 도인들은 함부로 살해당하고 임의로 가산 몰수를 당하는 등 핍박을 받으며……. 허민은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말을 자르며 신통에게 물었다. 그래, 너희 도인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되는가? 북으로 서북, 관북, 해서 지방에서 근기 지방은 물론이요 남으로 삼남에 이르기까지 백만이 넘을 것입니다. 허민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 나라에서 너희를 잡아 죽이려는 것이다. 너희 도가 정말로 척양척왜를 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다면 조정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내가 대감마님께 여쭈어보기는 하겠다. 무슨 방도가 있겠지. 비록 우리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소설 안에서 동학 운동(천지도 운동)은 관군과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50만 명이 희생되면서 좌절됐지만, 우리의 근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근대화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천지가 놀랄 만한 일대 사건이었고, 작가는 그 시대의 ‘이야기꾼’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스스로의 문학인생과 더불어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한 물음을 던지며 소설을 풀어나간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당시의 ‘이야기꾼’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다. 그들은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해체되던 시기에 매우 ‘수상한 중인층’이다. 그 시기의 사회가 신분층의 변동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라면 그들은 더 이상 신분 상승이 불가능했던 독서 계층이었다. 이 독서 계층 중 일부는 동학, 증산도 등의 혁명사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전기수, 강담사로 활약하며 그 시기의 수많은 작가 미상 방각본 소설의 생산자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구한말 당시에 작자 미상인 언패(諺稗) 백 수십여 종이 출판되어 책전에서 팔렸고, 이를 읽어주는 전기수만 해도 한양은 물론 지방 저자거리마다 있었다. 이야기꾼 강담사 역시 하나의 직업이 될 만큼 고을마다 있었고, 이들 서사가 음악으로 옮겨간 판소리 광대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했다고 한다. 이들이 각자의 당대를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여러 작품들은 남아 있다. 이런 이야기의 발생과 정체, 존재 이유, 이야기가 남기는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서구문학이라는 신문물과는 달랐던 19세기 말 당시의 가능성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가능성들을 토대로 이 이야기꾼들은 당시 어떤 변화의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마치 현재를 살고 있는 소설가 황석영의 아바타와도 같다. 한국문학의 살아 있는 역사 황석영! 등단 50주년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1962년 『사상계』에 「입석부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석영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동시에 그의 나이 칠십에 이르렀다. 그의 문학 인생 50년을 되돌아보면 단 한 순간도 평범했던 적이 없었다. 황석영의 발자취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항상 함께해왔다. 황석영이라는 인물 자체가 격동의 시대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황석영은 당대 역사의 큰 물줄기 속에서 단 한 번도 직면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맞서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황석영이 우리 식의 ‘이야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심해온 것은 그의 후반기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출옥 이후부터이다. 『오래된 정원』이 이전 산문의 습관들을 해체하는 데서 시작했다면, 그 뒤 연이어 발표한 『손님』, 『심청』, 『바리데기』 등은 우리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형식과 내용 모두 지금의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르포나 신문기사 같은 사실적 자료를 바탕으로 개발독재의 사회사를 서사적 다큐멘터리로 엮은 작품이 『강남몽』이고, 1980년대가 배경이었지만 줄거리 자체를 현대적 민담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낯익은 세상』이다. 그리고 이제,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자신을 돌아보며 19세기의 ‘이야기꾼’에 대해 집필한 자전적 작품 『여울물 소리』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작품은 이미 인터넷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여울물 소리』는 외세와 신문물이 들이치며 봉건적 신분 질서가 무너져가던 격변의 19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을 뒤쫓는 내용으로 동학과 이야기꾼이라는 존재를 큰 축으로 하고 있다. 19세기는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봉건왕조가 무너져가던 때로, 민중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학은 민중의 자생적 근대화 의지가 담긴 사상이었고, ‘이야기꾼’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존재로, 이신통을 통해 작가의 담론을 펼쳐낸다. |